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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깜짝선물"이라던 '성 김', 미국의 속내는?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성 김이 전면에... 미국, 대북정책 적극적 의지 있는지 의문

등록 2021.05.24 12:08수정 2021.05.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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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현지시간) 워싱턴 아이젠하워 행정동에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왼쪽부터 두번째)과 성 김 대북특별대사(왼쪽 세번째)가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로 공석이었던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자리에 성 김(김성용)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대행이 재기용됐다. 이번 인사가 북미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성 김에 대한 한미 양국 대통령의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워싱턴D.C. 시각으로 21일 한미정상회담 직후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 김을 낙점한 사실을 발표하면서, 정책적 전문성을 가진 외교관으로 소개했다. 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같은 자리에서 "(성 김 임명은)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통한 외교를 하고, 이미 대화의 준비가 돼 있다는 강한 의지 표명이라고 본다"라며 "한반도 문제에 전문성이 탁월한 분이 임명돼 기대가 크다"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귀국 비행기에서도 그에 관한 글을 썼다. 23일자 페이스북 글에서 그는 "성 김 대북특별대표의 임명 발표도 기자회견 직전에 알려준 깜짝 선물"이었다면서 "그동안 인권대표를 먼저 임명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대북 비핵화 협상을 더 우선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라고 성 김 임명을 높이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성 김 대사는 한반도 상황과 비핵화 협상의 역사에 정통한,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기여했던 분"이라며 "통역 없이도 (한국말로) 대화할 수 있는 분이어서, 북한에 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라고 기대를 표시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회견 직전 알려준 '깜짝 선물'... 대북 협상 우선시했다" 

성 김은 1960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한국 이름은 김성용이다. 그의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의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전 주일공사 김기완(가명 김재권)이다. <김형욱 회고록> 제3권에는 1970년에 김기완 주일공사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귀띔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의 성추문이 일본 현지에서 얼마나 심하게 퍼져 있는지'를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에게 용감히 보고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노발대발한 박정희를 대신해 도쿄로 날아간 박종규 경호실장 앞에서 김기완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한 것 가지고 상부에서 노한다면 할 말 없다는 거지요"라며 "관두라면 관두겠다"고까지 말했단다. 박종규와의 전화 통화로 그 사실을 듣게 된 김형욱은 "김기완이가 아직 정의감은 살아 있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김기완은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과도 관련됐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벌인 범행이므로 중앙정보부 일본 책임자인 그가 무관할 수는 없었다. 이때 그는 김대중 납치를 막지는 못했지만, 중앙정보부 지시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의 중앙정보부 차장보이자 '큰손' 장영자의 남편인 이철희가 그에 관해 증언한 일이 있다. 이철희와의 인터뷰를 담은 1998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 '73년 당시 중정 차장보 이철희 씨 드디어 입 열다'는 "그는 또 자신이 업무지시를 김기완 주일공사에게 내리자 김 공사가 역시 심하게 반발, '내 선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니 반대 의견을 부장께 말하라고 했다'고 회고"했다고 보도했다. 김대중 납치 때도, 김형욱의 말처럼 어느 정도 정의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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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의 아버지는 전 주일공사 김기완(가명 김재권)이다. 1998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김기완은 김대중 납치를 막지는 못했지만, "반대 의견을 부장께 말하라고 했다"는 등 중앙정보부 지시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 김기완을 따라 일본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 성 김은, 펜실베이니아대학과 로욜라 로스쿨을 거쳐 검사가 된 뒤 외교관으로 전업했다. 그 뒤 국무부 한국과장, 6자회담 수석대표 겸 대북특사, 주한미국대사,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주(駐)필리핀 대사, 주인도네시아 대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대행 등을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핵문제나 북미관계에서 상당한 경력을 쌓았다. 6자회담 수석대표 때나 대북정책특별대표 때뿐만 아니라 주필리핀 대사 때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2018.6)의 실무 협상을 이끌었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북미 협상에 참여했고, 한국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으며, 통역 없이 북한 대표와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은 북미관계를 평화적으로 푸는 데 강점이 되면 됐지 약점이 될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임명을 '깜짝 선물'로 표현한 문 대통령의 찬사는 과하지 않은 듯하다.

성 김이 대북정책 전면에 나선다? 미국은 왜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게 있다. 성 김이 오랫동안 대북 협상에 관여한 것과 그가 대북정책의 전면에 나서는 것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단순히 경험과 능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전면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므로, 미국 정부가 어떤 상황들에서 그를 전면에 세웠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일 시작됐다.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가 2002년 10월 5일 "북한이 우라늄 농축 핵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고 발언해 제2차 북미 핵위기(북핵위기)를 촉발한 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중국의 중재 하에 베이징에서 총 6차까지 열린 6자회담에서는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및 북한의 비핵화에 관한 어느 정도의 의견 일치가 도출됐다. 2005년 7월부터 열린 제4차 회담에서는 9.19 공동성명, 2005년 11월부터 2007년 2월까지 열린 제5차 회담에서는 2.13 합의, 2007년 3월부터 열린 제6차 회담에서는 10.3 합의가 나왔다.

그런데 이 회담은 2008년 12월 수석대표 회담을 계기로 사실상 중단됐다. 이 상태에서 2009년 7월 15일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한미일 3국은 그 선언에 개의치 않고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열곤 했지만, 북한은 '영원히 끝났다'는 그 선언을 뒤집지 않았다. 그래서 성 김이 수석대표를 지낸 2008년~2011년은 6자회담 시스템이 기능을 발휘하기 힘든 시기였다. 이 기간은 6자회담이 사실상 파탄 났는데도 미국이 그 외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기간이었다. 그 기간에 성 김이 오랫동안 수석대표를 지냈던 것이다.

그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지낸 2014년 11월부터 2016년 9월까지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작동하다가 이것이 약해지면서 '고강도 대북제재'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2016년 1월 6일 제4차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전략적 인내의 효용성에 의문이 생기면서 고강도 대북제재가 나타났고, 이것이 트럼프 행정부 초기까지 이어지면서 북미관계를 극단 상태로 몰고 갔다.

그래서 이 시기에도 성 김은 실질적 성과를 거둘 기회가 없었다. 이 시기의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대화의 문이 열려 있음을 북한에 표시하는 정도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상유지적 성격이 강한 전략적 인내의 시기이든, 대북 제재를 업그레이드한 고강도 제재의 시기이든, 대북정책특별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같은 두 가지 사례에 더해, 미국이 북한 문제에 에너지를 대량 투입하기 힘든 2021년 5월 시점에 그가 또다시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그를 전면에 내세울 때에 하나의 패턴이 작용하고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과거 패턴 살펴보니... 미국, 대북협상에 의지 있는 것 맞나 
  

2012년 4월, 서울 용산구 국방부 장관 접견실에서 김관진(오른쪽부터) 당시 국방부장관, 성 김 주한미국대사, 제임스 서먼 주한미군사령관이 회동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재의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때처럼 대북정책에 열의를 쏟기가 힘든 상황이다. 북한보다는 중국 및 러시아 쪽에 에너지를 투입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국내의 사회통합과 보건 문제에 역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핵문제에서는 북핵보다 이란 핵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한미일 3국 협력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은 사실상 한일 양국에 책임을 떠넘긴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일 어느 쪽도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다.

앞선 김여정의 거친 담화는, 북한 김정은 정권이 향후 1년간 문재인 정권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낳게 할 만하다. 또 북한이 일본을 상대하면 핵문제보다는 일본인 납치문제를 우선적으로 제기할 가능성이 크므로 북한은 일본 역시 꺼리고 있다.

대북관계에서 결실을 거두기 힘든 지금,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끌어들여 3국 협력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 자체가 미국이 대북정책에 대해 적극적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지금처럼 한일 양국의 지분을 높여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미일 3국 협력체제의 구축은 현상유지에 대한 미국의 의도를 상당부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성 김이 띠고 있는 대북협상 이미지는 '현상 유지'보다는 '현상 변경'에 가깝다. 그런 그를 현상 유지가 필요한 시기에 투입하는 것은, 미국의 협상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북한의 돌발 행동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쓴 것처럼 "북한에 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제스처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간 잘 나타나지 않은 성 김의 특성이 향후 북미관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 그가 단순히 지시만 받는 게 아니라 백악관과 국무부의 판단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시점을 포함해, 성 김이 전면에 투입된 세 번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백악관과 국무부가 그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실제로는 현상유지를 도모하되, 외형상으로는 협상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북한의 돌발 행동을 억제하고 새로운 정책의 수립 때까지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성 김 #대북정책특별대표 #6자회담 #북미관계 #대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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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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