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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가서 영어는 안 늘고, 한국어는 까먹게 되는 이유

유창한 우세 언어일수록 봉인과 해제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등록 2021.05.30 11:10수정 2021.05.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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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은 오직 한국어만 쓰는 것이 원칙이라지만, 나는 제네바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를 섞어 쓴다(나의 프랑스어 수준은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과 비슷하다). 추상적인 개념어일수록 대응되는 번역어를 가르쳐주면서 빨리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학생들의 제한된 한국어 어휘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냥 데모크라시(democracy)라고 말해주는 것이 빠르다.


어느 날, '바늘'이란 단어 뜻을 말해주려고 할 때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바늘이 영어로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고, 프랑스어 단어 에귀으(aiguille)만 생각나는 것이다. 내 두뇌 어딘가에 바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확실히 저장되어 있고, 나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단어를 금고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버린 기분이었다. 도저히 그 단어를 꺼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는 하루에 니들(needle, 침)을 수천 개씩 사용했던 한의사가 아닌가!

'에귀으'를 머리 속에 넣는 순간 '니들'은 피융~ 하고 튕겨나가는 걸까? 영어 실력을 유지한 채로 프랑스어 실력을 늘려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프랑스어 단어 하나를 외우면 영어 단어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친구나 선배들이 유학 갔을 때 푸념하던 말이 떠올랐다.

"영어 실력 느는 속도보다 한국어 까먹는 속도가 빨라."
"영어로 하는 말은 한국어로는 잘 안 나와."
"나는 0개국어 구사자야."


나는 그때 그 말들이 엄살인 줄 알았다. 설마 영어를 배운다고 한국어 실력이 퇴화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그 현상을 겪어보니 알겠다. 프랑스어를 배우니 영어 실력이 '잠금' 설정 된 기분이었다. 단어의 망각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이렇게 흔한 현상이라면 당연히 연구도 되어 있으렸다! 나는 언어학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 넣고 다니던 질문들의 답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영어를 배운다고 한국어 실력이 퇴화할까?
 

ⓒ elements.envato

 
알베르타 코스타의 <언어의 뇌과학>. 언어학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향후 몇 년간 풀릴 비밀이 많고 자신도 그 핵심 연구들에 관여하고 있다고 저자가 야심만만하게 썼는데, 이 책을 쓰고 나서 얼마 후에 사망했다.


이 책에 나오는 연구들에 따르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꿀 때(예: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로 말할 때) 우리 두뇌는 안 쓰는 언어들을 억제 상태로 둔다고 한다. 아, '잠금 설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바로 이거였다.

그렇다면 우세 언어를 '잠금'하는 게 쉬울까, 비우세 언어를 '잠금'하는 게 쉬울까? 예를 들어 나처럼 한국어가 편하고 영어가 어설픈 사람의 경우, 한국어를 말할 때(영어를 억제할 때) 영어가 실수로 튀어나오는 일이 잦을까, 반대로 영어를 말할 때(한국어를 억제할 때) 한국어가 실수로 튀어나오는 일이 잦을까? 아래를 읽지 말고 잠깐 머리 속으로 답을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나에게 어색한 영어를 말할 때 나에게 편한 모국어인 한국어가 튀어나오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그런데 그 반대다. 한국어로 말할 때는 자꾸 영어가 끼어든다. 하지만 영어로 말할 때는 한국어가 실수로 튀어나오는 일이 적다. 왜 그럴까?
우세 언어(한국어)를 '잠금'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우리 두뇌에서 우세 언어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폭넓은 신경망을 전부 꺼두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말하자면 영어로 말하는 동안 두뇌는 온 힘을 다해 한국어 신경망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에, 큰 힘으로 눌리고 있는 한국어가 그 억제를 뚫고 툭 튀어오르기 어렵다. 따라서 외국어로 힘들게 말하고 있을 때 내 모국어가 끼어드는 일은 적다.

반대로 한국어로 말하는 동안 영어를 억제하는 건 쉽다. 그냥 가볍게 영어를 누르고 있으면 된다. 가볍게 눌리고 있기 때문에 영어가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쉽다. 그래서 한국어로 말하다가 영어가 튀어나오는 일이 오히려 많은 것이다.

유학간 지인들이 한국어 까먹는 속도가 영어 향상되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 같다고 한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영어로 말하기 위해 그들의 두뇌는 온 힘을 다해 한국어를 봉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어는 완벽하게 잠금장치가 되어 있으니 한국어를 까먹은 느낌이 들고, 영어는 새로 장착하는 중이니 아직 수월하지 않은 상태인 것.

한국어는 정말 멀어졌지만 영어는 그만큼 가까워지지는 않았으니 억울한 기분이 들만도 하다. 그렇게 힘들게 영어를 쓰다가 한국어로 소통하려면 한국어가 오히려 잘 나오지 않는다. 강한 한국어 봉인 상태에서 해제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어도 아직 힘든데 한국어조차 나오지 않으니 당황할 만하다.

하지만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한국어는 일시적인 잠금 상태일 뿐, 구사 능력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영어 실력도 늘고 있는 중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참고로 이 언어 통제는 대뇌의 미상핵(caudate nucleus)이란 부분에서 담당한다.

이 모국어 억제를 보여주는 또다른 실험이 있다. 우선 여러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외국어로 그림 이름을 말하게 한다. book, tree, scissor, table.. 피험자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림 사이사이에 새로운 그림들을 끼워 넣고, 이번에는 모국어로 그 이름들을 말하게 한다. 책, 연필, 나무, 바지, 가위, 안경, 책상, 고양이... 피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피험자는 봤던 그림들인 책, 나무, 가위, 책상의 이름을 말할 때 추가된 새로운 그림인 연필, 바지, 안경, 고양이의 이름을 말할 때보다 더 어려워했다. 아까 외국어로 말할 때 모국어 신경망을 억제했던 부분들이 즉각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book이라고 말했던 그림을 책이라고 다시 말하려고 할 때 랙이 걸린 것처럼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여러 언어를 동시에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언어를 익히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언어들을 동시에 활성화 상태로 두기는 어렵다. 주둥이가 좁고 아주 깊은 항아리에 언어를 저장했다가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언어들을 수십 개 넣어둘 수는 있지만 주둥이가 좁기 때문에 한 번에 꺼낼 수 있는 언어의 개수는 제한된다. 잠재적인 상태로 저장해두었다가도 활성화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또 하나를 활성화시키면 다른 언어들은 억제된다.

이렇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는 것을 '코드 전환'(code switching)이라고 한다. 다언어구사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유창하게 말하면서 동시적으로 접근 가능한 언어의 상한선은 다섯에서 아홉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휴면 상태로 있다가 워밍업을 하면 서서히 깨어난다. 하지만 가끔 코드 전환의 일반적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등장한다.

초다언어구사자 메조판티 추기경이 묘사하는 코드 전환

마이클 에라드의 <언어의 천재들>에는 무려 73개 언어를 했다고 알려진 볼로냐의 메조판티 추기경의 일화가 나온다. 정말 73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많은 언어를 구사한 것만은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메조판티가 워밍업 시간 없이 즉각 코드 전환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메조판티의 친구이기도 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재미있는 깜짝 실험을 계획했다. 전세계에서 온 유학생 수십명을 줄지어 들어가게 해서 메조판티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나면서 바로 자기 모국어로 말을 걸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 고향 말인 방언으로 편하게 은어까지 섞어 가며 학생들이 말을 걸었는데, 메조판티는 바로바로 그 해당 언어로 바꿔가며 막힘없이 응답을 했다. 결국 교황은 메조판티의 완승을 선언했다. 메조판티는 이렇게 말했다.

'초록색 안경을 끼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이 초록색으로 보이셨을 겁니다. 제 경우도 딱 그렇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러시아어를 이야기할 경우, 러시아어의 색안경을 낀 것과 마찬가지여서 제 생각도 오로지 그 언어로만 보입니다. 다른 언어로 넘어가려 한다면, 저는 그저 색안경만 바꾸면 됩니다.'

코드 전환이 다언어구사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가족들과 다정하게 말하다가 회사 전화를 받으면 갑자기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를 쓰는 경우, 방탄소년단 멤버가 팬들에게 말할 때 서울 말씨를 쓰다가 혼잣말 할 때 갑자기 고향 사투리를 쓰는 경우,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 쓰는 경우 '이 스타일은 컨템포로리하고 고져스하네요'같은 경우도 코드 전환이라고 부른다.

친구들과 있을 때, 직장에 있을 때, 연인과 있을 때, 덕질할 때 우리는 모두 다른 페르소나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코드 전환이 일어난다.
#제네바 #한국어 #메조판티 #코드전환 #미상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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