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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며 글 쓰는 게 대단? 현실은 이렇습니다

엄마와 글 쓰는 노동자 사이... 경계인의 일상

등록 2021.05.28 08:36수정 2021.05.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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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과 식탁의 기능을 수행하는 우리집 식탁. ⓒ 김예린

 
하루 맑았다가 비 왔다가. 휴대폰 배경화면 속 구름은 며칠째 비를 뿌린다. 비 때문일까. 마음이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는다. 아니, 어제 마트 계산대에서 당한 새치기 때문일까. 짙은 구름이 드리워진 내 마음의 원인을 찬찬이 살펴본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과자 부스러기, 좀벌레 시체가 짙어진 마음 색을 더 어둡게 한다. 여기에 빨래통 가득 찬 빨래며, 버리지 못한 쓰레기봉투가 어두운 색을 더 보탠다.


아이들 어린이집 등원 후 온몸을 던져 소파 위에 눕는다. 인스타, 유튜브를 들락거리다 보면 한 시간은 금방이다. 몸은 소파와 한 몸이고 싶지만, 생각은 온통 날 기다리는 집안일과 글 쓰는 일에 있다. 모르척 외면해도 결국 나중에 내 일이 되는 것들. 몸을 바지런히 놀리지 않으면 집안꼴은 '정리정돈'과 영~멀어지고, 써야 할 글이 켜켜이 쌓일 테다.

엄마와 글 쓰는 노동자. 두 역할을 오가는 경계인의 일상은 몸은 부지런하지만, 지루하고, 따분하다. 그나마 일주일에 두세 번 가던 등산에서 만난 나무들의 춤바람으로 일상을 환기했건만! 한동안 그마저도 못했으니, 시곗바늘이 어제보다 더디게 움직이는 것 같다.

경계인은 한 시간 단위로 움직인다. 9시 30분 등원, 집에 오자마자 설거지, 10시 30분까지 청소 혹은 등산, 12시까지 글 퇴고, 1시까지 점심. 2시까지 기획 및 공부, 3시까지 반찬 만들기 등 매일 아침 정리한 일과를 성실히 수행하고 나면 4시 30분 아이들 하원이다.

하원 후 그냥 집에 가는 법은 없다. 날씨가 화창하면 곧바로 놀이터로 직행한다. 잡기 놀이, 상점 놀이, 산책, 마트 방문 등 아이들과 놀고 6시쯤 집으로 오면,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저녁 먹고 씻기고 재우면 10시. 10시에는 모든 체력이 방전된다.

눈 앞에 내 손을 기다리는 책이 쌓여 있다. 이럴 때는 책 한 장 넘길 생각조차 안 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책 반납하세요' 문자가 띠링 온다. 아쉬움에 반납 연기를 신청하지만, 쌓인 책을 일주일 안에 다 읽을 자신은 없다. 애써 '읽을 거야!' 하고 굳은 의지를 가져보지만, 일주일 뒤면 몇 장 넘기지 못한 책을 반납할 나와 마주한다.


경계인의 일상은 애매하다. 노트북 앞에서 글 쓰다 세탁기가 세탁을 마쳤다는 알람을 울리면 쓰던 걸 잠시 멈추고,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빨래를 옮긴다. 글 쓰다 머리를 환기시킬 때도, 바닥에 드러누울 때도, 쉼은 온전하지 않다.

누운 바닥 위에 흩뿌려진 과자 부스러기들, 소파 밑 굴러들어간 장난감도 눈에 거슬린다. '에잇. 안 보련다!' 했다가 10분 눈을 감았다. 결국 일어서서 청소기를 쥔다. 이럴 때마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경계인에게 식탁은 중요한 가구다. 아이가 생긴 뒤 서재 책상은 창고로, 50만 원짜리 의자는 옷방 옷걸이로 제 역할을 잃었다. 식탁 위는 두 개의 탁장 달력이 있다. 하나는 가족 대소사 기록용, 다른 하나는 내 일정 기록용이다. 식탁 위 두 개의 달력처럼 식탁은 시시각각 쓰임을 달리한다. 낮에는 나의 사무실로, 저녁에는 가족들과 만찬을 즐기는 곳으로 변한다.

지인들은 경계인에게 칭송을 보낸다. "대단하다", "부지런하다" 등등. 사실 대단할 것도 부지런할 것도 없는 일상이다. 원래 내가 아닌 남이 하는 일은 다 대단해 보이고, 부러워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난 지인들이 쏟아내는 문장에 속지 않으려, 그냥 웃는다. 

'엄마'로만 살다, 20년 뒤 마주한 내 모습에 '나'라는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내 이름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나는 경계인의 일상을 열심히 수행할 뿐이다. 오늘도 경계인은 엄마와 글 쓰는 노동자를 수 없이 오간다. 대단할 것 없는 일상을 묵묵히 열심히. 이유는? 오직 나로 살기 위해.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 중복 게재됩니다.
#엄마 #돌봄노동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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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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