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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업적에도 국무총리대리 사임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 / 47회] 그는 일찍부터 무관출신답게 직위나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등록 2021.06.18 18:45수정 2021.06.1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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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예관 신규식 선생이다. ⓒ 오마이TV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크게 기대했던 워싱턴의 태평양회의는 한국문제를 외면하였다. 한인대표들의 참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등이 일본과 한편이 되어서 방해한 결과이다. 

쑨원과의 회담을 성공리에 마친 신규식은 중국 호법정부 요인들과 중한협회(中韓協會)를 열고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태평양회의를 측면 지원하였다. 한국에 대한 을사늑약과 병탄조약 그리고 중국에 대한 21개조의 무효임을 주장하고 한국독립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 이를 전문으로 각국 대표에게 발송하였다. 

그럼에도 서구열강과 일제는 한국과 중국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 워싱턴회의가 성과 없이 마무리되자 임시정부는 크게 실망하면서 내부 진통을 겪었다.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를 상대로 얻은 성과와는 별개로 국민대표회의 추진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기대가 큰 활동일수록 그 결과에 따른 영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정부 차원에서 가능한 외교수단을 총동원하여 활동을 폈지만, 태평양회의가 기대한 것과 전혀 동떨어진 방향으로 끝나버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시 안팎으로 큰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태평양회의 전후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국민대표회 추진운동은 다시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신규식 내각은 물러서기로 작정했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1922년 2월 말에 사임서를 제출하자, 신규식은 마지막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3월 20일 끝내 이시영과 함께 사직하고 말았다. 노백린 군무총장을 제외한 국무원 전원이 총사퇴를 결의하고 만 셈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 (주석 1)

 

중국의 아버지 손문과 대한민국의 아버지 신규식 ⓒ 위키피디아

 
신규식은 이에 앞서 2월 8일 열린 제10회 의정원 개원식에서 국무총리(대리)로서 '고사(告辭)'를 통해 단합할 것을 요망하였다.

아국 독립을 다시 선언한지 어자(於玆) 사재(四載)에 외적과 내간(內奸)을 아직도 잔제(殘際)치 못하고 조국의 촌토(寸土)도 아직 회복치 못함은 우리 전민족이 공히 통한하는 바이며 독립에 직접 종사하는 '독립운동자'들의 한가지로 울분하는 바인 중국민의 중탁(重託)을 수(受)하야 그 전구(前驅)로 입(立)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원 제인(諸人)은 각기 소존(所存)과 소능(所能)을 0진(0盡)하야 4년이나 효로(效勞)하였으나 현(顯)히 진행 성취함이 무(無)함은 무재(無才) 무능의 소치이라 고성(顧省)할 시에 송한(悚汗) 공구(恐懼)한 바 무비(無比)이며,

더욱 비재(匪材)로 외(猥)히 국무수규(首揆)의 석(席)에 재한 여(余)의 심사(心思) 여하(如何)는 제군과 밋 국민이 응당 상상(想像)하리라 하노니 재능이 결핍(缺乏)하야 대업을 진전 성공치 못한 책(責)을 부(負)하고 추현(推賢) 양능(讓能)의 소지(素志)를 수행함으로써 국면(局面)을 전개하야 신로(新路)를 척도(拓導)코져 함이 여(余)와 밋 다수 각료의 정(定)한 직성(直誠)의 의사(意思)라,


그런대 경망을 피하고 신중을 고(顧)하는 중 그 실현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니 의원 제군은 현재 진행되는 모든 안건을 토의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공기(公器)의 유지와 밋 그 진전에 관한 모든 책안(策案)에 대하야 세계 대세와 오인(吾人)의 처지와 아한민중의 심리와 밋 정부 각원(閣員)의 고충을 완전 투철(透徹)히 영해(領解)하야 비상한 각오와 결심과 용기와 공성(公誠)으로 의정(議定) 실행함을 여(余) 비록 불초하나 제 각료와 공히 직(職)에 재(在)한 일일(一日)에는 일일(一日)의 직을 갈성(竭誠) 이행하려니와 또한 진퇴에 무관히 공기(公器)유지(維持)와 대중(大衆) 진전(進展)에 시종 노력하랴함을 제군은 기억할지며 협조할 지어다. (주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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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던 집 입구. 지금도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 김종훈

 
그는 일찍부터 무관출신답게 직위나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 연구가는 이 시기 정부각료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로 법무총장에 취임하여 정부조직 초기의 모든 절차와 규정을 정리하였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하나를 들면 그는 「임시지방교동사무국장정」을 만들어 안동현(安東縣)에 교통사무국을 신설함으로써 국내와의 연락거점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공작원의 왕래, 비밀문서와 군자금의 연락ㆍ중계가 원할해졌음은 물론이다. 

둘째로 1919년 10월에 발간을 중단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獨立)』을 1920년에 『독립신문』으로 개제(改題)하여 발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대한』ㆍ『대한임시정부공보』 등을 발행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널리 선전하였다. 

셋째로 1921년 2월 18일에 신규식은 새로이 발족을 본 중화민국 호법정부(護法政府)의 대총통 손문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방문하여 국서를 전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양국 정부간의 외교관계 수립ㆍ5백만원의 차관문제ㆍ한국청년의 중국군관학교 입교문제, 그리고 한국독립운동에의 원조문제 등 여러 현안문제를 타결하였다. 

또 중화민국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師式)에 정식 국가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는 의국사절로는 유일한 빈객이었고 이것은 한ㆍ중 양국간의 우호관계의 재확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임시정부의 존립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여 놓은 것이다. (주석 3)


주석
1> 김희곤, 앞의 책, 375쪽.
2> 『독립신문』, 1922년 2월 15일.
3> 민기, 「임정수립의원훈 신규식」, 『근대의 인물(2)』, 145~146쪽, 양우당, 1988.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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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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