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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이런 곳에 홀로 남은 무기제조 공장

나라 힘을 기르려는 조선의 몸부림, 기기국 번사창

등록 2021.06.20 18:00수정 2021.06.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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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1876년 운요호 도발로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한낱 오랑캐로만 여기던 왜(倭)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자, 온 나라가 얼얼하다. 군함과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의 무력시위 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호개방은 시대적인 흐름이었으나, 조약체결 후 일본의 견제와 간섭은 점점 도를 더해간다.

신무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


1879년 7월, 천진(天津) 이홍장(李鴻章)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다.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며, 신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켜 방비를 튼튼히 하라는 당부다.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내용이나, 신무기 제조에 관한 첫 논의다. 일본의 견제가 거슬리지만 고종은 이의 추진을 김윤식(金允植) 등 젊은 개화파에게 맡긴다.
  

베르단 소총 아관파천 후 대한제국 군인들이 주력으로 사용한 소총. 1880년대 조선은 이런 작은 소총 조차도 제작은 물론 조달도 여의치 못한 처지였다. ⓒ 전쟁기념관

 
1880년 7월 변원규(卞元圭)가 자문(咨文)을 들고 천진 이홍장을 찾는다. 자문은 '청은 무기가 정밀하고 예리하여 천하에 위력을 떨치는데, 천진창(天津廠)은 사방에서 정교한 공인들이 모이는 곳이자 각국의 신기한 기술이 집중된 곳이니, 재간 있는 조선인을 유학시켜 신무기 제조법 배우기를 진정으로 소원한다'는 내용이다.

변원규는 중국어는 물론 문장에도 능통하다. 이홍장과 4개조의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辨來學製造操練章程)'을 체결하여 유학생 파견이 가능케 조치한다. 신무기 제조 기술을 익히고 군사훈련을 겸할 길이 비로소 열린 것이다. 변원규는 겸하여 천진 기기국(機器局)·제조국(製造局)·군기소(軍機所) 및 서고(西沽)의 무기와 화약 등을 두루 견학한다.

중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개틀링 기관총 1894년 일본군이 공주 우금치 등지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살상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기관총. 미국 남북전쟁 당시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전쟁기념관

 
1881년 2월 고종은, 신무기제조법을 배워오는 모든 절차를 갓 설립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맡아 처리하라 명한다. 하지만 아문은 친일파가 장악하고 있어 세세한 정보가 일본 공사관으로 흘러들어간다. 같은 달 통리기무아문은 신무기제조법을 배워오는 사신을 영선사(領選使)라 부르고 유학생을 보내 무기제조 기술을 배우며, 교관을 초빙하는 방안 등을 보고한다. 윤 7월에 김윤식이 영선사로 임명된다.

9월에 영선사 일행이 유학생 69명을 데리고 청나라로 향한다. 병장기 만드는 천진기기국 두 개 국(局)에 배속되어 무기제조 기술을 익힌다. 하지만 유학생들의 천진 생활은 그다지 안온하지 못하다. 풍토병에 걸려 조기 귀국하거나, 나라에서 뒷받침하는 재정이 열악하여 배움마저 신통치 못하다.

비판도 매섭다. 1882년 3월 사직 상소를 올리는 좌의정 송근수는 군인들 급료도 주지 못하는 열악한 나라사정을 한탄하며, 이런 상황에서 국비 유학생이 웬 말이냐며 비판한다. 그의 염려와 우려, 매서운 비판은 곧 현실이 되고 만다.


1882년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도성은 쑥대밭이 되고 왕비는 도망치며, 일본공사관이 불에 탄다. 청나라가 진압에 나서 이태원 등에서 무자비한 살상이 벌어진다.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고, 나라는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은 더욱 극심해진다.

김윤식은 현실을 올곧게 직시한다. 조선은 재정이 몹시 열악하고 내부분열 및 외세의 참견과 간섭이 극심하다. 따라서 대포나 군함 같은 대형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에 당장 활용 가능한 부문을 익히고, 장차 만들어질 기기국 규모까지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에 급하게 전략을 수정한다. 우선 유학생들이 당장 이뤄낼 기술부터 익히도록 조치한다. 손기술로 만들 수 있는 탄약이나 화약, 소총 등 작은 무기 제조에 학습 역점을 둔다. 학습이 이뤄지면 얼마 남지 않은 유학생도 조기 귀국시킬 예정이다. 그리고 따로 기계를 구입해 조선에 국(局)을 설치, 자체로 신무기를 제조할 생각을 갖는다. 원대한 꿈을 꾸고 69명 유학생을 데려간 지 불과 1년 남짓이다.

기기국 설치 
 

2015년 기기국 터 발굴 모습 기기국 번사창 주변을 발굴하는 모습. 건축물 흔적으로 보아 나머지 공장들도 번사창과 규모가 유사하였음이 확인됨. ⓒ 서울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제물포 조약 체결 이후 일본 군대가 한양에 주둔한다. 친일 여론이 잦아든 자리를 청 세력이 파고들어 득세한다. 임오군란 사과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젊은 관료들은 그들에게 포섭 당한다. 이는 훗날 갑신정변의 도화선이 된다.

1883년 3월 영선사 종사관 김명균이, 천진에서 공장 지을 건축가와 설비 담당 기술자 4명을 초빙해 온다. 고종은 5월에 기기국(機器局) 설치를 명한다. 각각 4인의 총판(總辦)과 방판(幇辦)을 임명하고, 위치는 숲이 우거져 왕래가 뜸한 경복궁 근처 삼청동이다. 유학생들도 과학 및 기술서적, 설계도와 기기 모형을 들고 속속 입국한다.

그해 8월 건축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김명균이 기기국에 쓸 각종 기기를 중국에서 구입해 온다. 건물 완공은 난망이다. 조선은 벽돌을 쌓아 집 짓는 기술이 부족하다. 중국인 공장(工匠) 10여명이 조선인을 가르치며, 건축을 독려한다. 무기제작에 필요한 설비의 제작과 설치는 전적으로 중국 기술자에게 의존한다.

기기국은 분리된 5개 건축물로 구성된다. 번사창(飜沙廠,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무기를 만드는 곳), 숙철창(熟鐵廠, 탄소량 조절로 더 강한 쇠를 만드는 곳), 목양창(木樣廠, 나무를 다루는 곳), 동모창(銅冒廠, 총신 등을 만드는 곳)과 고방(庫房)이다. 각 창은 감동(監董)이 독립적으로 관리하고, 방판이 총괄하는 직제다. 기기국 제창(諸瘡)이 1884년 6월 20일에, 기기창(機器廠)이 1887년 10월 29일 완공되어 기기국 건설이 완료된 것으로 고종 실록은 기록한다.

홀로 남은 번사창
  

번사창 정면 모습 화강암으로 만든 정문과 벽돌로 만든 측문이 보인다. 모양이 다른 5개 창과 서까래 없이 벽에서 잘려나간 지붕 처마가 이색적이다. 지붕에 한층을 들어올린 고측장이 보이고, 건물은 짙은 회색조의 중국식 벽돌을 사용하였다. ⓒ 이영천

 
지금은 번사창만 홀로 남았다. 번사창은 삼청동에 위치한 한국금융연수원 내부 한쪽에서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언제 사라졌는지 불분명하나, 1894년 청일전쟁 중 사라졌다는 게 중론이다. 2015년 발굴된 건물 군 흔적에서 나머지 건물도 번사창과 유사한 규모였음이 확인되었다. 번사창을 일제는 세균검사실로, 미 군정청은 중앙방역연구소로 사용한다.

그 후 방치되다 1984년 5월 31일 개수한다. 개수작업 도중 25명 건립위원과 11명 기술자가 참여한 내용이 적힌, 이응익(李應翼)이 비단에 쓴 상량문이 발견된다. 또한 '엎드려 생각건대 무기를 저장코자 반석(盤石)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이라 하였다. 칼·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수선·보관하는 건물은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번사창 정면 세부 장대석과 사괴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짙은 회색조 벽돌을 2중으로 쌓았다. 정문은 아치형 화강암이고 창문은 모양이 다르다. 서까래 없이 잘려나간 지붕처마와 한옥기와를 얹은 지붕은 목재트러스를 짜 지지시켰다. 열과 먼지등을 배출할 목적으로 들어올린 고측창이 보인다. ⓒ 이영천

 
기기국 터는 약 19000㎡로 상당한 넓이다. 번사창은 높이 10m에 25.6m×8.5m(217.58㎡) 규모다. 청나라 풍 건물이다. 천진 기술자들이 건축하였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건립 당시 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남아 있었음을 건물은 확인시켜준다. 지붕은 고측창(高側窓, Clearstory, 지붕에 채광·환기 용도로 한 층 높게 낸 창)을 두어 들어올렸다. 무기 제조라는 건물용도에 맞게 작업 중 발생하는 열, 먼지, 오염되고 뜨거워진 공기를 손쉽게 배출시키려는 조치다.

토대(土臺)는 장대석(長臺石, 층계나 축대를 쌓는 길게 다듬은 돌)과 사괴석(四塊石, 벽이나 돌담 등을 쌓는 데 쓰는 육면체의 돌)이다. 토대 위에 진회색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벽체를 만든다. 붉은 벽돌은 각각의 출입문에 장식된 방추형(원기둥꼴) 띠를 이룰 뿐이다. 벽돌크기는 25cm×5cm로 요즘 벽돌과 다르다. 벽체 중간에 모양이 다른 커다란 여닫이 창문을 두어 계절에 맞춰 이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기기국 번사창 우측면에 벽돌로 만든 아치형 문을 두고 양측으로 창을 내었다. 후면에도 창 여럿이 배치되어 있어, 무기제조 공장으로써 기능적인 목적을 추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 이영천

 
기단부와 정문은 돌이다. 아치형 정문은 화강암, 아치형 2개 측문은 벽돌이고 붉은 벽돌 띠를 넣어 장식한다. 지붕과 고측창은 나무로 짠 삼각 트러스(Truss)를 일정간격으로 거치시킨다. 그 위에 한옥을 절충한 맞배지붕 기와를 얹었다.

서까래가 없어 지붕 끝이 벽면에서 짧게 잘려나간다. 트러스와 벽돌 벽이 만나는 부분은 못으로 결합하거나 벽면에 그대로 끼워 넣어 간결하게 처리한다. 장식 없이 간결한. 서양을 모방한 중국식 건축기술이 한옥지붕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각 문과 창문은 널빤지를 이어 붙였다.

우리나라 최초 신무기제조공장이다.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간결한 모양과 형식으로 결합되었다. 부분 부분이 서로의 단순화된 장점만을 취하였다. 번사창이 완성되고 반년 후 '갑신정변'이 일어나, 3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그 결과 '한성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침략 의도를 더욱 노골화한다. 신무기를 만들어 힘을 키우려던 조선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만 간다.
덧붙이는 글 엄중한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취재에 협조해 주신 한국금융연수원 관계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기국 번사창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辨來學製造 #통리기무아문 #김윤식_변원규_김명균 #강화도조약_제물포조약_한성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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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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