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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신발 장사 접는 날 "2만원이나 깎던 할머니였지만, 고마워요"

[나만의 방 ③] 사장님 임채숙씨 "월세 너무 올라서... 40만원어치 재고, 단골 분들이 다 구입"

등록 2021.06.20 17:59수정 2021.06.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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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가 필요하다.'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책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망원동에서 나만의 방을 꾸려가는 여성 사장님들을 만나봤습니다. 그들에겐 자기만의 방 그리고 무엇이 필요할까요.[편집자말]

재고 정리를 위해 가게 앞에 진열해 놓은 신발들 ⓒ 홍하늘


"발의 이 부분이 자궁이야. 여기는 소장, 대장이고. 이 부분을 디뎌야 해. 자 이제 걸어봐."

신발 하나를 권하는데도 설명이 길다. 정작 돈을 내는 손님은 사장 걱정부터 한다.

"언니, 이제 이걸 못해서 어째."

사장 임채숙(62)씨는 순순히 인정한다.

"그러게, 내가 이걸 못하고 어찌 살지 몰라. 발만 보면 설명해주려고 발동이 걸리는데..."

지난 6월 6일, 여느 때처럼 손님에게 발과 건강의 연관성에 대해 열을 다해 설명하던 '슈나이스' 사장, 임씨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슈나이스'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기능성 신발 가게다. 임씨가 16년간 운영해 온 가게지만, 6일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마지막 영업일 오전 10시,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미처 팔리지 않은 신발들을 가게 밖에 진열했다. 재고정리를 위해 싼 가격에 내놓자 손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내놓은 신발들을 보며 "35년의 세월이..."라며 한숨 쉬었다. 35년, 그가 망원동에서 장사를 해온 시간이다. 그는 신발가게가 본인에게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고 했다. 그는 "어제부터 두근두근 댔다"며 "모든 걸 놓는다고 생각하니 아쉽다"고 말했다.


단골손님들도 가게에 들러 마지막을 함께 했다. "저번 여름 신발도 여기서 샀다"는 한 손님은 신발 한 켤레를 사며 "이제 못 봐서 어떡해, 어딜 가서든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라고 덕담을 건넸다.

"딸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라는 한 손님은 가게에 들어와 익숙한 듯이 의자에 앉았다. 손님은 "오랫동안 가게에 들락날락 했는데 내일부터 없다니까 섭섭하다"면서 30분 동안 임 씨와 얘기를 나눴다. 손님은 "이제 훨훨 날아다니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손님이 정신없이 몰려들었던 점심시간대가 지나자 가게는 한산해졌다. 오후 6시, 그의 남편이 가게에 도착해 에어컨을 떼기 시작했다. 오후 7시, 가게 밖에는 여전히 신발을 진열해놓았지만 본격적인 내부 정리 작업도 함께 진행됐다. 저녁 식사는 생략했다. 식사 권유에도 임씨는 "입맛이 없다"며 고개만 가로 저었다.  
 

손님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벽에 붙여 놓은 발 그림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 임채숙(62세)씨의 모습 ⓒ 홍하늘


끝내 팔리지 않은 신발 약 10켤레 정도를 박스 안에 넣어 차에 실었다. 정리를 하며 어느새 그의 시선은 인체와 발 그림이 잔뜩 붙어 있는 벽면에 가있었다. 이날도 그는 몇 번씩 그 그림들을 가리켜가며 손님들에게 발과 건강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한참을 복잡한 표정으로 벽 앞에 서있었다. 금방 끝난다던 정리 작업은 8시 반을 넘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밥 다음으로 중요한 게 신발, 16년 동안 자부심 갖고 장사했어요"

- 어떻게 장사를 시작하셨나요?
"남편이 아팠어요. 내가 가장으로서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장사를 시작한 거죠. 제가 사연이 많아요. 신발 가게를 하기 전에는 망원시장 안에서 옷가게도 하고, 치약·칫솔도 팔았어요. 그러다가 발목이 아파서 신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신발 가게를 하게 됐죠."

-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밥 다음으로 중요한 게 신발이에요. 그 다음이 건강식품 먹고 그러는 거고요. (좋은 신발 신어야 된다고) 단골들한테 거의 귀에 딱지 앉게 설명했어요. 상대방이 건강하기를 원하니까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높은 신발 신던 사람이 편안한 신발 신게 되면 뿌듯하죠."

- 어떤 기준으로 신발을 들여오세요?
"건강할 수 있는 신발을 사요. 발은 디뎌야 할 곳과 안 디뎌야 할 곳이 있어요. 뒤꿈치가 들어가고 가운데가 나와야 돼요. 그런 신발을 시장에서 직접 골라서 들여놔요. 자부심을 갖고 팔았어요."

- 가게는 왜 그만두시는 거예요?
"가게 월세가 너무 올라서요. 처음보다 4배 정도 올랐어요. 가게 주인한테 저 나가면 월세 절대 올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어요. 다들 좀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요. 막상 그만두니까 아쉬움과 여러 가지 감정들이 드네요. 가족을 먹여 살린 곳이고 내 놀이터 같은 곳인데 그만둔다고 하니까... 저는 누가 와도, 어떤 발을 만나도 책임질 수 있었거든요. 손님들한테 가르쳐주고 도와주는 게 즐거웠어요. 그건 제가 잘할 수 있는 거니까요. 밥만 먹으면 습관적으로 나오던 일터가 없어지는 게 아쉬워요. 단골들이 정말 수도 없이 많은데 다시 못 본다는 것도 그렇고요."
 

손님에게 발과 건강에 대해 설명하는 임채숙(62세)씨의 모습 ⓒ 홍하늘


- 단골손님들도 아쉬워하시겠어요.
"단골손님들이 '우리는 신발 어디 가서 사나. 그냥 장사 계속해' 이렇게 말해요. 사실 할머니들하고 장사하는 거 너무 힘들거든요? 5만원이라고 하면 3만원만 주면서 가격을 터무니없이 깎아요. 그래도 그들이 저의 괴로움이자 기쁨이고 힘이에요. 단골이라고 다른 데 안가고 꼭 여기 오고, 여기 아니면 신발 못 신는다고 해요. 감사한 거죠. 잔뜩 쌓여 있던 신발도 20일 만에 이만큼 정리한 거예요. 다 단골 분들이 사줬어요. 40만원어치 신발도 사줬고요. 수고하셨다고 눈물 글썽이고, '너무 슬프다'면서 저를 안아주는 분들도 있었어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요?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그게 뭔지 저도 모르지만, 찾아야죠.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있어요. 장사 쉽지 않아요. 1년, 2년이면 옆 가게들 다 없어지는데 여기서 16년 한 거잖아요. 능력 있는 거죠. 저한테 수고했다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 장사는 끝이에요. 적응이 안 돼도 이제 또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거죠."
#폐업 #자기만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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