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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보다 무서운 건 인간, 신개념 호러 이끈 임창정의 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장르의 결합 돋보였던 코믹 호러 < 시실리 2km >

21.06.19 12:12최종업데이트21.06.1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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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종류 이상의 것을 섞어 새롭게 만드는 일을 '퓨전(fusion)'이라고 한다. 조금 어렵고 전문적인 말 같지만 사실 퓨전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 들어 있다. 예컨대 서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에서 파전과 막걸리를 판매한다거나 투박한 SUV차량에 스포츠카 엔진이 달려 있는 것, 그리고 입고 벗기 불편한 한복에 지퍼를 달아 편하게 개량한 것도 모두 퓨전의 일종이다.

퓨전은 문화계에서 더욱 자주 볼 수 있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르에 하드록, 국악, EDM 같은 전혀 다른 장르를 접목해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퓨전 음악들은 이미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해를 품은 달>, <구르미 그린 달빛> 등 딱딱한 이미지의 사극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퓨전사극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드라마와 코미디를 접목한 시트콤은 이미 방송가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영화계에서도 장르의 결합은 끊임없이 시도돼 왔다. 특히 보기만 해도 무서운 호러 영화와 스트레스 해소에 일품인 코미디 영화의 접목은 쉬운 듯하면서도 좀처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힘든 퓨전 방식이다. 그런데 지난 2004년 '신개념 펑키호러'를 표방한 퓨전 호러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호러 영화라 하기엔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코미디 영화라 하기엔 으스스했던 임창정 주연의 < 시실리 2km >였다.
 

<시실리 2km>는 2004년 여름에 개봉해 전국적으로 2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 (주)쇼박스

 
가수와 배우 넘나드는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

인기 가수가 연기를 겸업하거나 유명 배우가 음반을 내는 일은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그 두 가지 일을 임창정처럼 슬기롭게 병행하는 연예인은 매우 드물다.

영화 <남부군>의 어린 빨치산 역으로 데뷔한 임창정은 드라마 <해 뜰 날>, <여명의 눈동자>,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 <게임의 법칙> 등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임창정이 배우로서 확실히 자리잡은 작품은 '17대1 신화'의 주인공 환규를 연기했던 <비트>였다.

<비트>를 통해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임창정은 같은 해 발매한 3집 앨범이 크게 히트하며 최고의 만능엔터테이터로 떠올랐다. 그리고 임창정은<엑스트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자카르타>, <색즉시공> 같은 영화를 연이어 성공시켰다. 가수와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임창정은 2003년 영화 <위대한 유산>의 개봉을 앞두고 돌연 가수 은퇴를 선언해 대중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임창정이 가수 생활을 그만두고 선택한 첫 번째 영화가 바로 < 시실리 2km >였다. 신개념 펑키호러를 표방한 < 시실리 2km >는 전국 198만 관객을 동원하며 임창정을 영화배우로 정착시켰다. 이후 임창정은 <파송송 계란탁>,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11번가의 기적>, <색즉시공 시즌2>를 차례로 히트시켰다(송지효와 함께 나온 <색즉시공2>는 관객평가가 매우 낮지만 전국 2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흥행에는 성공했다). 

임창정은 2007년 <스카우트>에서 1980년 선동열 스카우트를 위해 광주에 내려 갔다가 광주 민주화 운동에 휘말리는 Y대 야구부 직원 호창을 연기했다. 비록 <스카우트>는 전국 31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지만 임창정은 <스카우트>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9년 6년 만에 가수로 컴백한 임창정은 <청담보살>과 <불량남녀>, <사랑이 무서워>가 나란히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기며 아쉬움을 남겼다. 2012년 <공모자들>로 160만 관객을 모았지만 <창수>와 <치외법권>,<게이트>의 흥행실패로 배우로서 슬럼프에 빠져 있다.

하지만 임창정은<또 다시 사랑>,<내가 저지른 사랑>,<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힘든 건 사랑이 아니다>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가수로는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호러와 코미디를 넘나드는 신개념 펑키 호러
 

임창정의 엄청난 열연은 <시실리 2km>의 가장 큰 재미요소다. ⓒ (주)쇼박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지나치게 인적이 드물거나 외딴 섬은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공포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한 영화들도 많이 제작됐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만든 <이끼>나 김한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극락도 살인사건>, 그리고 지난 2016년에 개봉해 680만 관객을 모았던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모두 섬이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 시실리2km > 역시 실제로는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시실리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 내내 귀신이 출몰하고 시종일관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신개념 펑키 호러를 표방한 영화답게 영화의 분위기는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입담이 좋고 애드리브에 강한 배우 임창정을 중심으로 안내상, 박혁권, 우현 등 탄탄한 경력의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끊임 없이 웃음을 전달한다.

109분의 런닝타임 동안 정신 없이 호러와 코미디를 넘나들지만 결국 < 시실리2km >는 귀신보다 무서운 인간의 욕심에 대해 풍자하는 영화다. 평화롭게 살던 마을 사람들은 석태(권오중 분)의 콧구멍에서 발견한 다이아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생매장하고 끝내 양이(임창정 분) 일행까지 몰살하려 한다. 결국 더 많은 다이아를 갖기 위해 서울로 떠나던 마을 사람들은 귀신 송이(임은경 분)에 의해 교통사고로 최후를 맞는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이야기에서 끝까지 웃음을 놓치지 않도록 이끌어 준 주역은 역시 임창정이다. 전국노래자랑 동작구편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깡패 김양이를 연기한 임창정은 "야, 소풍왔냐? 소풍왔어?", "벼개(베개)가 없다고 벼개 사달란다" 같은 코믹한 대사들을 도맡는다. 특히 산에서 해주(우현)와 벌이는 나이논쟁은 < 시실리 2km >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다만 임창정의 맹활약에 비해 '시트콤 왕자' 권오중의 역할엔 아쉬움이 남는다. 권오중은 데뷔 후 처음으로 주연 타이틀을 달고 출연한 영화 < 시실리2km >에서 하필이면 시체 역을 맡아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영화 속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실제로 석태가 멀쩡하게 살아 움직였던 시간은 영화 시작 후 20분 정도에 불과했다.

착한 귀신 연기한 신비소녀 임은경
 

<시실리 2km>는 현재까지 임은경의 마지막(?) 흥행 영화로 남아 있다. ⓒ (주)쇼박스

 
사람들은 흔히 '귀신은 무섭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대부분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 시실리2km >에 등장하는 귀신 순이는 다르다.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양이를 치료해주고 양이가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며 반말을 하자 쿨하게 '야자'를 허락한다.

욕심에 눈이 멀어 점점 더 악행을 일삼는 인간과 비교해 더욱 착하게 묘사되는 귀신 송이를 연기한 배우는 1999년 이동 통신사 모델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비소녀' 임은경이다. 당시 통신사와의 계약조건 때문에 폭발적인 관심 속에서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던 임은경은 2002년에야 첫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려 11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서울관객 5만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임은경은 <성냥팔이> 이후 영화 <품행제로>와 드라마 <보디가드>를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고 < 시실리2km >에서도 착한 귀신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했다. 하지만 같은 해 개봉한 <여고생 시집가기>가 또 다시 흥행 참패했고 시트콤 <레인보우 로망스> 이후 10년 가까운 공백을 가져야 했다. 공백기 동안 중국 활동과 쇼핑몰 모델로 활동한 임은경은 작년 2월 <라디오 스타> 출연 후 다시 활동이 뜸해졌다.

< 시실리2km >는 개봉 당시 캐스팅이 화려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17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상당히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양이 일당에는 중견배우 안내상과 우현,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로 유명해진 박혁권이 있고 마을 사람들 역에는 명품배우 김윤석과 변희봉, 그리고 <상속자들>의 제국그룹 비서실장과 <SKY캐슬>의 황치영 교수로 유명한 배우 최원영이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시실리 2KM 임창정 권오중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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