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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인과 멱살잡이, 마을에서 내린 강력한 처벌

[프로골퍼의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 10] 농촌마을에 기증된 선물

등록 2021.08.16 18:30수정 2021.08.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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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 수확기가 산수유 작업에 도입되고 난 이후로 모든 공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계조(組)도 산수유 제피기의 지랄 같은 성격을 대충 알아차리고 살살 잘 구슬리고 있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할 만했다.


사실 산수유 제피기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남편의 공이 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이 인간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기계를 만든 제작자를 찾아냈고, 그 사람과 통화를 한 것이다.

연로하신 제작자는 산수유 제피기의 사용법을 정성을 다해 알려주셨다. 그동안 그 기계를 군대 후임병 대하듯 한 기계조의 접근 방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제작자에 따르면, 제피기를 젖먹이처럼 어르고 달래듯 돌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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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고된 작업을 끝내고 봄을 맞이해 휴식을 즐기는 산수유 제피기 ⓒ 노일영

 

엉뚱하게 굴러간 굼벵이

그런데 굼벵이가 구르긴 했지만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구르고 말았다. 제작자와 통화한 내용에다 남편이 자신의 의견을 슬쩍 덧붙여서 기계조에게 전달하는 바람에, 제피기를 통과한 산수유 열매가 어중간한 모양새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열매는 완전히 짓뭉개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씨만 쏙 빠진 오동통한 내 너구리같은 형상도 아니었다. 나는 분명 제작자에게서 출발한 정보가 남편을 통과하며 왜곡되었을 거라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인간이 열매를 데쳐야 하는 시간 정보를 제멋대로 수정한 것이다. 남편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그저 잡음의 역할을 한 것뿐이었다.


"아니, 왜 마음대로 산수유 열매 데치는 시간을 줄여버렸냐고?"
"나의 종합적 분석과 합리적 판단으론 그 시간 간격은 너무 길어서."
"그러면 산수유 제피기에 대해서 그분보다 당신이 더 잘 안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됐고, 그분이 몇 분 데치라고 했어?"
"보자, 그게, 생각이, 까먹어버렸네."


쯧쯧. 그래, 이젠 더 이상 실망할 여지도 없다. 깍두기가 깍두기로서 열일을 한 것뿐이다. 다시 그분에게 전화하라고 다그쳤지만, 남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쪽팔려서 못하겠다나. 사람의 얼굴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쪽'이란 것이 이 인간에게도 있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총대를 멘 사람은 마을기업을 제안한 분이었다(이분은 우리 조합 이사진의 일원이니 앞으로 이 이사로 부르겠다). 이 이사는 기계 제작자와 통화를 한 것이 아니라, 산수유 제품을 만드는 농장 겸 공장으로 전화를 걸어서 제피기에 관련된 정보를 얻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하고, 제피기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밝히자, 상대방은 산수유 작업에 관한 모든 공정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잠재적 경쟁자에게 이 모든 영업 비밀을 털어놓는 걸 보면,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었다. 감격한 이 이사는 상대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중요한 내용마저 가르쳐주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요, 한번 해보면 앞으로 다시는 안 하실 거라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상대방은 이렇게 야무지게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마지막 한마디 말을 우리에게 전하는 이 이사의 얼굴에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해맑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남편은 그 미소에 전염되어 경망스럽게 깔깔거렸고, 반장을 비롯한 회원들 모두 한바탕 웃음으로 가세하며, 산수유 농장 사장의 예언을 만담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어버렸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은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회원들 간에 처음으로 갈등이 발생한 것은 산수유 작업 때문은 아니었다. 이 이사가 연구회에 제공한 1톤 트럭이 문제였다. 수확해야 할 산수유나무가 마을회관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차량을 이용해서 열매를 운반해야 했고, 이 이사는 승용차 하나로 생활이 충분하다며 자신의 트럭을 우리 연구회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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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소유에 관한 심오한 질문으로, 남편을 개싸움으로 인도한 트럭의 현재 모습 ⓒ 노일영

 
멱살잡이 불러온 트럭 기증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기증이었다. 연식이 오래됐다고는 하지만, 트럭을 기부하다니. 이 이사 이 양반에게 트럭이란 어떤 존재일까, 연구회 회원들 모두 소유와 존재에 관한 심오한 질문 앞으로 강제적으로 소환 당했다. 남편만 예외였다.

"이 이사님, 만수르 가문의 숨겨진 아들 아닐까? 눈도 부리부리하고 이국적으로 생기셨잖아."

하여튼 이 인간에게 진지함 따위를 기대하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 이사는 협동조합이 설립되면 트럭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조합으로 넘기겠다고 밝혔다. 도대체 이분의 의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흐르고 흘러 트럭을 기증하는 이 지점에서 멈추게 되었을까? 나로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도도한 듯하면서 동시에 구불텅구불텅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기증된 트럭은 키가 꽂힌 채 마을회관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게 갈등의 발단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7시 45분에 마을회관 마당으로 출근하면, 작업반장은 늘 뒷짐을 지고 흰색 트럭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협동조합의 공동 자산 1호로 등록될 그 트럭이 무척이나 대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대견한 트럭 앞에서, 헐! 남편과 귀촌한 분이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웠다. 경솔의 아이콘에다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 질투심이 강하고 체력과 의지력도 나약한 남편은 성질머리도 고약한 편이다. 어쨌든 그 귀촌인이 기증된 트럭을 개인적인 용도로 몇 번 이용했다. 그때마다 남편이 트럭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지적을 한 듯했다.

산수유 작업을 하루 쉬게 된 어느 날, 그 귀촌인이 산에서 그러모은 땔감을 문제의 그 트럭에다 싣고 오는 장면을 남편이 목격한 모양이었다. 마음의 수양이라고는 1도 안 되어 있는 남편이 먼저 상대의 멱살을 거머쥐고야 말았다.

이 인간은 나의 감시망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이렇게 바로 들짐승이 돼버린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서 그 귀촌인의 옷깃을 덥석 움켜쥔 것이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괴생명체를 통제하려면 당근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채찍만이 답이다.

트럭 앞에서 펼쳐진 멱살잡이는 참으로 볼 만한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이리 밀치고 저리 밀리며 밟는 두 사람의 스텝을 보며 배경 음악으로 탱고가 깔린다면, 완벽한 주성치식 코미디가 완성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났다, 처음에는.

구경꾼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주먹다짐으로 번질 싸움이 아니란 걸. 얼마 전 윗동네에서 주먹질이 오가는 난투극이 벌어졌고, 농사일로는 만져 볼 수도 없는 거금이 합의금으로 지불된 사건이 있었다.

서로의 멱살을 힘차게 비틀고 있는 두 사람도 그 사건을 모를 리 없었다. 둘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 주먹이 나가는 순간 '게임비'가 얼마나 될지,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슬로우 슬로우, 퀵퀵, 슬로우 퀵퀵 슬로우.

화려한 발놀림을 보며 단어가 하나하나씩 떠오른다. 탱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피아졸라, 체 게바라, 마라도나, 이구아수 폭포, 해피투게더, 양조위와 장국영, 사랑하고 이별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아 슬프다, 또 뭐가 있더라, 하는 순간 둘은 반대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제 이 두 사람은 영화 <해피투게더>의 아휘와 보영처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영화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 남편의 멱살잡이 싸움을 보며 떠올린 내 마음의 장면 ⓒ (주)디스테이션

 
가장 강력한 페널티

남편과 다툰 그 귀촌인은 다음날 곧바로 우리 연구회에서 탈퇴했다. 남편도 짐승처럼 날뛰었으니 도의적 책임을 지고 탈퇴해야 마땅했으나, 뻔뻔하게도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았다. 작업반장에게 이 인간을 제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 귀촌인이 빠지면서 산수유 작업을 할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남편은 일손 축에도 못 끼는 열외 인원에 가깝다고 강조했지만, 반장은 그것마저도 아쉬운 형편이라고 답했다.

"그래도 페널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하고 있는 깍두기 자체가 페널티 아닌가?"
"그 인간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문제라구요."
"좋아, 그러면 정말 퇴장을 시켜버리자고."
"잠깐만요. 그 인간은 퇴장당하면 더 좋아할 거 같아요.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잘라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아요. 명분을 쌓는 거죠."
"좋아, 그러면 깍두기가 아니라 정식 기계조로 만들어버리자고. 제피기 리듬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하루 종일 맞춰야 하니까, 이건 정말 처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해서 남편은 기계조로 편입되었고, 이 이사는 트럭 기증을 철회했고, 다른 종류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을기업 #협동조합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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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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