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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창도와 계승의 역사성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2] 동학의 '동(東)'은 우리나라 고대의 국호에서 기원한다.

등록 2021.06.23 17:56수정 2021.06.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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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동학 교당에 게시되어 있는 최제우 공식 영정 ⓒ 추연창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1년 창도하고 해월 최시형 선생이 승계하여 뿌리내린 동학(東學)은 흔히 서세동점의 물결에 따라 밀려온 서학(西學)의 대칭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동학의 '동(東)'은 지정학적 대칭 용어가 아닌 우리나라 고대의 국호에서 기원한다.

옛부터 우리 나라는 '동방에 있는 나라'라고 하여 동국(東國)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식자들이 이해한 '동국'이란 관념은 대체로 지리적으로는 요하(遼河)를 경계로 하는 '만리(萬里)의 국가'를 상정하였다. 중국에서는 동이(東夷)라고도 하였다. '동'과 관련하여 많은 저술이 이루어진 것은 이것이 국호이기 때문이었다.

『동국여지승람』ㆍ『동국명산기』ㆍ『동국문헌』ㆍ『동국문헌비고』ㆍ『동국문헌절요』ㆍ『동국사략』ㆍ『동국세시기』ㆍ『동국여지승람』ㆍ『동국지리지』ㆍ『동국통감』ㆍ『동사강목』 등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의학을 동의(東醫)라 부르고,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의서를 한데 모아 편찬한 조선조 때의 으뜸가는 의학서를 일컫는다. 

동학은 우리 문화, 우리 학문, 우리 철학, 우리 종교, 우리 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결코 배타적이거나 그렇다고 국수적이지 않은 시대정신이고 민족사상이고 민족종교이다.  

수운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유교의 인륜, 불교의 각성, 선교의 무위와, 수운 자신의 인시천(人侍天) 사상을 접화군생(接化群生)한 천도사상을 말한다. 동학의 중심개념은 인시천 즉 천인합일사상으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고(事人如天), 억조창생이 동귀일체(同歸一体)로 계급제도를 부정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부인권(人乃天)을 내세우는 신앙ㆍ철학ㆍ사상의 복합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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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가 발행한 <동학> 표지(왼쪽)와 경주 구미산 용담정 내의 최제우 초상(정만진 찍음) ⓒ 경주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봉건체제와 대립하여 수운이 창도한 동학은 개항 후 그 모순이 집중적으로 심화되어 온 삼남 지방을 토대로 크게 발전하였다. 동학혁명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근대조선 민중 해방운동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된다. 

첫째는 18세기 이후 악화된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정치적 모순, 둘째는 삼정의 문란, 셋째는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국가 보위의식의 팽배, 넷째는 전통적인 유교의 폐해에 따른 지도이념의 퇴색, 다섯째는 서학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 의식으로 대응하려는 자세, 여섯째는 실학에서 현실 비판과 개혁 사상에 영향받은 피지배 민중의 의식 수준의 향상과 높아진 지각도 등을 들 수 있다.   

동학은 주자학적 전통으로 굳게 닫힌 전근대의 강고한 철벽에서 인권ㆍ평등ㆍ자존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삶의 주체로서 민족정신을 일깨워서 근대의 문을 열게 되었다. 봉건적 전근대의 철문을 닫고 근대의 광장을 연 것이다. 


동학은 창도 초기가 도인들의 각성기라면, 중기는 교조신원운동과 교세확장, 후기는 동학혁명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교조를 사도난정(邪道亂正)으로 몰아 처형한 정부는 내적인 개혁요구와 세계사적인 변혁의 사조에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있다가 강제 개항을 맞게 되었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서 동학은 제국주의의 침투에 의한 반식민지화와 국내 봉건적 관료층의 수탈로 신음하는 피압박 민중의 해방운동과 반봉건ㆍ반외세 투쟁을 위한 혁명이념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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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우측 부조. ⓒ 안병기

 
동학혁명은 1894년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미곡 징수와 만석보의 수세징수가 농민의 원성을 사게 되자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봉기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세계혁명사, 예컨대 영국의 청교도혁명, 독일의 종교개혁,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중국의 신해혁명,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은 모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변혁운동이었다. 우리의 경우 동학혁명을 이들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자주적인 민중혁명에 속한다. 

특징이 있다면 동학을 창도한 교조와 2세 교조, 3세 교조가 잇따라 당대의 정치권력과 외세 침략세력에 의해 참사를 당했다는 점이다. 세계 유수의 종교 창도자들 역시 대부분 수난을 겪지만, 2~3대 교조까지 변을 당한 경우는 동학이 유일하다.

수운은 고종에게, 해월은 고종과 일제에 의해 참수당하고, 3세 교조 의암은 3ㆍ1혁명 주도와 관련 투옥되었다가 숨지기 직전에 석방됐으나 사실상 옥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 동학도와 참여농민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도 세계혁명사에 유례가 없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창도자와 후계자의 독특한 '만남'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사상사 최대의 이단사상가로 꼽히는 이탁오(李卓吾)는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기독교는 예수가 베드로를 만남으로써 세계적 종교가 되고, 불교는 부처가 가섭(迦葉)의 염화미소(拈華微笑)를 통해 불심을 전하게 되고, 서양철학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으로써 아테네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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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 안병기

 
수운과 해월의 관계가 그렇고, 해월과 의암의 사이가 그랬다. 사제지간인가 하면 동지이고 벗이었다. 해월은 추적을 피해 언제라도 피신할 수 있도록 항상 짚신 한 켤레에 밥 한 끼를 넣은 봇짐을 옆에 두어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도피 중에도 스승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피고 동학의 조직정비와 포교에 노력했다.

해월과 의암의 관계도 그렇기에 그토록 혹독한 시국에서도 동학정신이 살아남아서, 전근대의 철문을 깨고, 만민평등ㆍ척왜척양의 동학혁명을 일으키고, 자주독립ㆍ민주공화주의를 표방한 3ㆍ1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해월 최시형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 #최시형 #최시형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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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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