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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인혁당 사건 피해자, 국회 앞에 선 이유

민주유공자법 제정 요구 릴레이 1인시위 시작... "셀프 특혜? 그 말에 많은 이들 상처"

등록 2021.06.21 16:48수정 2021.06.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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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피해자 박중기(88세)씨가 21일 오전 국회 앞에서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 소중한

 
"민주화를 위해 힘쓴 이들을 대우해줘야 앞으로 이 나라가 잘못됐을 때 누군가 또 나설 것 아닙니까."

1934년생 박중기씨가 21일 오전 8시 국회 앞에 섰다. 그의 손엔 "민주유공자법 제정은 후대에게 민주화운동 정신을 올곧게 전달하는 일입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이 들려 있었다.

박씨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1974년 8명이 사형을 당한 '2차 인혁당 사건' 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 이력을 갖고 있다. 인혁당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공안조작 및 사법살인 사건으로 꼽힌다.

박씨 외에도 많은 이들이 함께 국회 앞에 섰다. 백옥심(고 안치웅 열사 어머니)·최종순(고 최우혁 열사 친형)·강선순(고 권희정 열사 어머니)·장남수(고 장현구 열사 아버지)씨도 "민족민주열사들의 유가족들은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20년 넘도록 발의만 하고 있는 국회는 열사에게 진 빚을 언제 다 갚으려 하십니까"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든 채 출근길 국회 앞에서 사람들과 마주했다.

이들은 그 동안 국회에서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 등의 이름으로 발의됐다가 폐기되기를 반복한 약칭 '민주유공자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1998년부터 최근까지 10여 차례 발의된 이 법안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보훈 대상자(교육·취업·의료 등 지원)인 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게 법안의 주된 내용이다.

이 법안이 매번 좌초된 이유는 특혜 논란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셀프 특혜'라고 공격하는 반대자들의 주장이 강해졌다. 지난 3월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법안 철회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론에 밀린 설 의원은 사흘 만에 법안을 거둬들였다.

정치권의 공세, 특히 민주화운동 경력을 갖고 있는 야권 정치인들도 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특권 없애려고 데모한 사람들이 특권을 만든다"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출신으로 2020년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로 출마한 김영환 전 의원은 "법안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며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를 오늘로 반납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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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피해자 박중기(88세)씨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장남수 회장(고 장현구 열사 아버지)·강선순 총무(고 권희정 열사 어머니)가 21일 오전 국회 앞에서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 소중한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적 민주화운동 단체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는 유공자 등록 범위를 사망·부상자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가협은 지난 7일 성명을 통해 "법안에 문제점이 있으면 당사자들과 협의해 해소하면 된다. 재원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논의해 결정하면 되고 소위 셀프 특혜가 문제라면 셀프 특혜가 되지 않도록 제정하면 된다"라며 "그런데 20여 년이 넘도록 법안 발의만 되고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면 이게 더 큰 문제 아닌가"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회의원들 이외에 민주유공자로 등재돼야 할 국민들이 수없이 많다"라며 "(정치인들을 위한 셀프 특혜라는) 해괴한 논리 때문에 국회가 보다 나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고령이 된 민족민주유가족에겐 금전적 혜택이 거의 없다. 미혼이라 자녀가 없이 사망한 열사이거나 자녀가 있더라도 다 성장해 대학입학·취업 혜택도 필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우리나라 민주제단에 바쳐진 희생자들을 국가유공자로 하여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이 유족들의 마지막 바람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1인 시위 현장에서 만난 강선순(고 권희정 열사 어머니, 유가협 총무)씨는 "많은 이들이 '나라와 미래를 위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숨을 바쳤던 것 아닌가"라며 "사람들이 (민주유공자법을 두고) 욕심이라고 하는데 제게 욕심이 있다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이들의 이름이 유공자로서 후대에 남는 것뿐"이라고 호소했다.

이창훈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쉽게 말을 내뱉고 있는데, 그들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과 같이 평생 힘들게 살아오신 이들이 보이지 않는 건가"라며 "민주화를 위해 힘쓴 많은 이들이 그런 말로 인해 상처를 입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국회에 앉아 정치를 하고 있는 이들도 모두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빚을 진 사람들"이라며 "20년 간 법안이 만들어졌지만 논의 한 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가협은 당분간 매일 국회 앞 시위를 이어갈 예정이다.
#민주유공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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