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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을 바닷가에 세워놓고 수류탄을 던져 죽였다

한국전쟁기 태안군 근흥면의 민간인학살... 학살은 보복을 낳고, 다시 학살로 이어져

등록 2021.07.17 20:16수정 2021.07.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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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갔던 최천수(가명)는 해군 309정에 몸을 싣고 충남 태안군 군흥면 정죽리에 있는 안흥항에 도착했다. 최천수의 마음 한켠에는 분노와 흥분이 일었다. 항구에는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 수십 명이 서 있었다.

뒷결박 지어져 항구에 서있는 이들은 다름 아니라 북한군 점령 때인 인공 시절 '부역혐의'를 받고 있었다. 해군 특무상사가 그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는 그 중 눈빛이 살아 있던 김광섭에게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쳤다. 이왕 죽을 바에야 하고 싶은 얘기나 하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특무상사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권총을 꺼내 김광섭 얼굴을 정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구와 김광섭의 거리가 불과 1m도 안 되었기에 총알은 그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이후에도 특무상사의 검지가 계속 움직였다. 순식간에 손가락이 여섯 번 움직였고, 김광섭의 얼굴은 통째로 날아갔다. 앞서 김광섭은 해군과 교전하면서 군인 한 명을 사살한 바 있다. 과잉살상은 그에 대한 보복이었다. 

"흑백 같은 소리하고 있네"

특무상사의 광기는 식을 줄 몰랐다. 끌려온 사람 중에는 김수원(당시 24세), 김노랭이(별명), 김막둥이(별명) 삼형제가 있었다. 특무상사는 막내 김막둥이를 계선주에 올라가게 했다. 계선주는 배를 매어 두기 위해 부두에 세워 놓는 기둥이다. 특무상사의 오른손 검지가 움직이자 김막둥이의 목이 꺾여지면서 몸뚱이가 바다로 떨어졌다.

항구에서 피의 살육제를 벌인 해군 특무상사 일행은 안흥지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서에서는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심사가 한창이었다. 배에서 내려 지서에 미리 도착해있던 최천수 치안대장이 특무상사에게 경례를 했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라 군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지금 뭐하는 거요?" "흑백(黑白)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흑백? 흑백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전부 일어 서!"


유치장 등에 있던 부역혐의자들이 모두 끌려 나왔다. 주민 30여 명도 겁먹은 눈빛을 하고 해군 일행의 뒤를 쫓았다. 혐의자들은 바닷가에 일렬횡대로 늘어섰다. "사격 준비"라는 특무상사의 구령에 총구가 반짝였다. "사격"하는 소리와 동시에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이어서 "쾅"하는 소리가 났다. 다름아닌 수류탄 터지는 소리였다.

최천수의 입이 딱 벌어졌다. 군사작전을 하듯이 수류탄까지 던져 부역혐의자들을 싹쓸이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죽창 하나 들지 않은 민간인이 아닌가. 조금 전 항구에서 김광섭의 머리가 날아간 모습을 본 데 이어 소총과 수류탄으로 주민들을 살상하는 모습을 본 최천수와 치안대원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날 총질은 안흥항 바위 위에서 끝을 맺었다. 특무상사는 여성 두 명을 바위 위에 세워 놓고 조준사격했다. 그중에는 가의도리 주민으로 인공 시절 근흥면 여맹위원장을 한 장순태도 있었다. 1950년 10월 8일 해군의 총질과 수류탄 투척으로 목숨을 잃은 태안군 근흥면 주민은 37명이었다.(『태안 민간인학살 백서』, 2018)

태극기 들고 환영대회 나갔는데....

이보다 앞선 1950년 9월 29일. 근흥면 면소재지에서 '군·경 수복기념 환영대회'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태선 등 근흥면 마금리 주민은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길을 나섰다.

"아이고 군·경이 수복한다니, 이제 살 만하겠구만." "글쎄 말여."

그런데 어쩐 일인지 면소재지에는 마금리 주민 십여 명밖에 보이질 않았다. 돌아온다던 군인과 경찰도 콧빼기도 안 보였다. 얼마 후 마금리 주민들이 군경수복환영대회를 하려 했다는 소식을 지방좌익들이 들었다. 그들은 군경을 피해 근흥면 소재지인 용신리에 모여 있었다. 

마금리 주민들의 행동은 전세가 역전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북으로 후퇴하는 방법을 찾던 지방좌익들에게 불안을 자극했다. 결국 악에 받친 지방좌익들은 10월 4일 용신리 해변에서 마금리 주민 12명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희생자들은 모두 농민이었다. 이날을 전후로 근흥면 주민 22명이 세 차례에 걸쳐 지방좌익에게 죽임을 당했다. 박계환은 의용소방대원이었다는 이유로, 조제환(남로당 경력자, 의용소방대장)과 노기진(29세, 면서기)은 지방좌익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었다.

이 와중에 최천수는 서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서산군(현재의 서산시) 양대리 총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 좌익에게 죽창으로 몸 12곳을 찔려 죽을 뻔했다. 때문에 최천수는 근흥지서 경찰들이 수복하기 전부터 근흥면 치안대장을 맡는 등 좌익척결에 앞장섰다. 근흥면 역시 태안군의 다른 면과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이은 '지방좌익에 의한 사건'이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뒤이어 '부역혐의자 학살사건'도 유사했다.

지서장·면장·이장들이 '부역자심사위원회' 구성
 

근흥면 부역혐의자들이 구금되었던 근흥지서 옆 창고 ⓒ 박만순

 
이후 경찰과 치안대에 의한 근흥면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은 10월 초순부터 12월 말까지 수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수복 직후 근흥지서 경찰과 치안대는 각 마을의 민간인을 연행해 면사무소 창고에 구금했다. 경찰과 치안대 감찰부가 이들을 1차로 취조했다. 그리고 '부역자심사위원회'가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결정했다. 최천수 치안대장의 증언이다.

"취조계원이 작성한 내용을 내가 낭독을 해.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총살)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근흥면 면장하고 이장들도 그 쓸 만한 이장들도 모여 갖고, 이름이 없고 협의체여. 지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면장, 지서장, 각 리 이장, 그리고 나, 다 합의를 봐야지."
-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즉 지서장, 면장, 치안대 간부, 이장 등이 부역자심사위원회를 구성해, 부역혐의자들의 생사를 결정한 것이다. 10월 31일 근흥면 안기리 주민 최긍우를 포함한 민간인 30여 명이 용신리 해변 질목으로 끌려갔다. 절벽 위에서 경찰이 총을 쏘면 시신이 모래사장으로 떨어졌다. 경찰들은 사람 뒤통수에 총구를 대고 검지를 움직였다. 그렇게 근접사격을 하니 생존자는 있을 수가 없었다.

"동무네는 영웅 가족이오." 근흥면 인민위원회 간부는 안기리의 함필기(당시 19세)를 한껏 추켜세웠다. 함필기의 형 함인기, 함현기는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전쟁 직후에 학살되었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농과 가구를 만들었던 함인기는 한국전쟁 전 근흥지서의 강압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동생 현기(미혼)도 마찬가지였다.

함인기·현기 형제는 전쟁이 나자 지서에 연행되었고 대전형무소 방향의 공주 어디에선가 죽임을 당했다. 형 둘이 죽고 난 후 남은 동생 함필기는 인공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의 행정에 협조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그는 1950년 10월 용신리 해안에서 경찰과 치안대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함인기의 독자 함정만(73세,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은 삼촌 함필기의 학살 장소를 가보자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 삼형제의 죽음을 기억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태안군 민간인희생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족회 사무실에 선 함정만 ⓒ 박만순

 

시신이 밀물과 썰물에 떠밀려 다녀

인공 시절 민청(민주청년연맹) 활동을 했던 윤일미(근흥면 안기리, 당시 42세)는 수복 직후 경찰과 치안대원들에 의해 근흥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인공 시절 윤일미가 한 일이라고 해봤자 마을 사람과 풍물 치고, 자기 집에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게 전부였다.

그는 안흥항에 있던 안흥지서로 끌려가 2주간 구금됐다. 어머니 조씨가 매일 밥을 해 날랐다. 어느날 조씨는 아들 밥을 도로 집으로 가져왔다. 다음날 안기리에는 '윤일미가 안흥항 바닷가에서 학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윤일미의 시신은 매일 밀물과 썰물에 떠밀려 다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윤용찬(1944년생, 충남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은 "잠만 자면 아버지의 시신이 바닷가에서 휩쓸려 다니는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아버지(윤일미)가 학살된 장소에 선 윤용찬 ⓒ 박만순

#태안군 #민간인학살 #안흥항 #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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