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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대표가 꼭 한번 걸어봤으면 하는 길

[동작민주올레-시즌2] '문익환 목사와 방북' 유원호의 중원엔지니어링이 있는 사당길

등록 2021.08.02 10:52수정 2021.08.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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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지난 13일 국회에서 취재진을 만나 전날 양당 대표 회동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최근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뜬금없이 '통일부 폐지'를 주장하면서 잠시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다. 다행히 지난 7월 27일 '남북 통신선'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교착상태에 놓여 있던 남북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통일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가시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열린 것이다.

그럼에도 제1야당 대표의 통일부 폐지 주장에 이은 '평화적 흡수통일론'이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준석 대표는 지난 6월 27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나는 통일은 계속 해야 한다고 배웠다. 다만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하는 통일에 관심이 많다. 소위 말하는 흡수 통일이다. 저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북한 체제의 가치 중) 살릴 가치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북한에 경제를 배우겠나, 교육을 배우겠나, 법률 체계를 배우겠나. 말 그대로 우리 체제로 통합해야 하는 거다. 건질 게 하나도 없는 나라다."

이준석 대표는 2019년 6월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공정한 경쟁>에서 이미 흡수통일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는데, 제1야당 대표가 된 이후에도 입장의 변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셈이다.

그런데 이준석 대표의 '평화적 흡수통일론'은 북한이 스스로 붕괴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통일방안이다. 더 큰 문제는 북한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남북관계를 경색국면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남한 내 평화통일론자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남남갈등을 극대화시켜 한반도 전역을 비평화적인 상황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주장이라는 데 있다.

마침 동작민주올레 '사당길'을 걸으면서 정부 차원의 남북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던 시절 남과 북의 평화 통일을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오늘 그 곳을 찾았다.

문익환 목사, 민간인 신분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통일방안을 합의하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경향신문 1면(1989. 3. 28)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여 북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 경향신문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여 북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문익환은 이 회담에서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을 설득하여 본인이 주장하는 연방제통일 3단계론을 사실상 수용하도록 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공동 발표문 4항에서 "남북 쌍방이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할 필연적 통일 방도이며 이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하여 북이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수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합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에 이루어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개념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에 익숙해 있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줌과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불과 4년 전인 1985년에는 국회의원(유성환 의원)이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기보다는 차라리 통일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도 문제 삼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감옥살이를 하던 나라였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겪으며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이를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빌미로 삼아 오히려 민주화 운동 세력을 강하게 탄압했다.

사당동에 있던 중원엔지리어링의 유원호와 문익환 목사는 어떤 관계?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는 소설가 황석영,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그리고 유원호가 함께 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길산> 등으로 유명했고,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도 1970년부터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회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유원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유원호는 원래 방북 대열에 합류할 대상이 아니었다. 문 목사는 아들 문호근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비자 문제가 생겨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급하게 유원호에게 부탁했는데, 유원호는 이에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유원호는 동작구 사당동에 중원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대표를 맡고 있었다. 중원엔지니어링은 재일동포 2세인 스즈쿠 도시오가 회장으로 있는 일본 가드레일공업(주)과 합작해서 자본금 1억5천만 원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노태우 정부는 덜 알려진 유원호를 북한의 공작원으로, 유원호의 동생 유원철(중원엔지니어링 전무)을 조총련 등 반국가단체와 접촉한 창구로 몰고 가려고 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북의 공작에 의해 놀아난 결과물로 매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장덕빌딩(사당동 147-104) 3층에 있던 중원엔지니어링은 즉각 압수수색 대상이 되었다. 유원호의 동생 유원철도 임의동행 형식으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밤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유원호나 유원철은 당연히 조총련이나 북한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유원호는 고 김녹영 국회부의장의 비서 출신이었고, 김대중계에 속해 있었음에도 198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광주에서 김영삼 당선운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9개 항의 '4·2 공동선언' 발표라는 성과를 이끌어 낸 문익환 목사 일행

문익환은 김일성 주석과 한 두 차례 회담에 이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도 회담을 가진 후인 1989년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이란 제목의 '4·2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합의 성명의 주요내용은 ①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②정치·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접촉 실현, ③연방제 방식의 통일, ④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문익환 일행은 원래 판문점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북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북에 더 머물기로 한 황석영을 제외한 문익환, 정경모, 유원호 등 3인은 중국의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왔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안기부에 연행될 것임을 안 이들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방북 성과를 언론에 알렸다.

문익환 목사 일행의 수난과 당당했던 유원호 피고인
 

석방된 유원호(한겨레신문, 1993. 3. 7) 문익환과 유원호는 1심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언도받았으나, 2심에서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언도받았다. 문익환과 유원호는 4년의 감옥생활 끝에 1993년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 한겨레신문

 
도쿄에 남은 정경모를 제외한 문익환과 유원호 2인은 김포공항에 들어오자마자 안기부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유원호 피고인은 1989년 7월10일 열린 2차 공판에서 "북한을 보는 시각과 가치판단에 따라 반국가단체인지의 여부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진술해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의문을 제기했다. 유원호 피고인은 8월 28일 열린 5차 공판의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통일은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의 당면과제이기 때문에 북한을 방문"했다는 취지로 자신의 방북 동기를 당당히 밝히기도 했다.

문익환과 유원호는 1심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언도받았으나, 2심에서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언도받았다. 문익환과 유원호는 4년의 감옥생활 끝에 1993년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한편, 정경모는 우리 사회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보안법 기소중지'의 벽에 막혀 51년이 지나도록 끝내 귀국하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 망명객'으로 2021년 2월 일본에서 숨을 거뒀다.
#유원호 #문익환 #사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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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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