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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앞두고 한국 떠 보는 일본 정부?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한국이 관계개선책 제시않으면 의례적 회담 검토' 보도한 일 언론

등록 2021.07.09 16:31수정 2021.07.0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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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가려 응대하는 옛 이야기가 있다.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대학자였던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린 유명한 이야기 '집염'이다.
 
집안이 나름 부유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수염이 길었는데 어느날 아내에게 '상객이 오면 수염 윗부분을 잡고, 중객이 오면 중간 부분을 잡고, 하객이 오면 아랫부분을 잡을 테니, 그에 맞춰 술과 음식을 내오시오'라고 했단다.

부부간의 약속이었지만, 어떤 외부인이 이 신호를 알게 됐다. 이 사람이 수염 긴 남자의 집에 갔는데 집주인이 수염 아랫부분을 잡고 있었다. 술과 음식은 형편 없었다. 이후 이 일을 아는 손님이 그 집에 들렀다. 집주인이 수염 아랫부분을 잡고 있자 손님이 '손을 조금만 위로 올려주시오'라고 말했다. 집주인은 무척 부끄러워 했다.

손님을 상·중·하로 나눠 차별하는 잘못된 행태를 비꼰 이 이야기와 비슷한 일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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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부야 스카이 전망대에서 바라본 올림픽메인스타디움. 2021년 6월 22일 촬영분. ⓒ 연합뉴스=교도통신

 
지난 8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3일 개막하는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방일할 경우에 대비해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의 한일정상회담 개최 검토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다만,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한국이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짧은 시간 의례적인 회담으로 한정할 생각'이라며 '본격적인 정상회담에 응할지는 한국 측의 대응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집염' 이야기 속 수염 긴 남자마냥 일본 정부도 상황에 따라 정상간 만남에 격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

1961년 방일

일본 정부나 스가 총리가 바라는 방향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 총리를 매우 흡족케 한 한국 지도자가 있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다. 

당시의 한일관계도 지금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1951년 10월 20일 열렸고, 4.19 혁명 6개월 뒤인 1960년 10월 25일에 제5차 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었다.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적반하장식 태도가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과거 이케다 하야토 내각(1960~1964)이 원했던 것도 아베 신조나 스가 요시히데가 원하는 것과 같았다. 한국이 식민지배를 문제삼지 않는 전제 아래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 역시 한국인의 정서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절충적 방식을 생각했다. 과거사 문제와 경제협력 방식을 동일한 테이블에서 일괄 타결하고, 경제협력으로 사과·배상을 갈음하는 방식이었다. 지난 6월 29일 윤봉길 기념관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제안했던 '그랜드 바겐'이 바로 그런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들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식민지배와 한민족 착취에 대한 명확한 청산 없이 경제협력으로 무마하겠다는 발상은 한국인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 한국 지도자가 국민적 요구를 대변하려 했다면, 일본 방문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이 냉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정희 의장은 일본 방문을 결행했다. 일괄타결, 그랜드 바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에 동조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사전 준비를 마쳐 놓은 뒤인 1961년 11월 11일, 그는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해 10월 20일부터 도쿄에서 제6차 한일회담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톱다운' 방식으로 매듭짓고자 했던 것이다.

박정희 "사소한 문제에 대립하지 않고"... 크게 환영한 일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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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임기 1960~1964). ⓒ wiki commons

 
일본 정부는 박정희가 도쿄에서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객'으로 대접하기로 했다. 박정희 방일 전인 1961년 11월 8일, <동아일보>는 '국빈 대우로 영접'이란 기사에서 "일본 정부는 7일 박정희 한국 최고회의 의장이 오는 12일 방일할 때에 그를 국빈에 상응한 대우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라고 보도했다.

박정희가 도착한 11월 11일. 일본 정부는 대단한 환영식을 열어줬다. 이케다 총리를 비롯한 내각 각료들이 공항까지 마중 나갔다. 재일한국인 5000여 명도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공항을 메웠다.

그의 도착 성명은 일본 정부의 뜨거운 환영에 화답할 만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오늘 본인이 지전(池田, 이케다) 수상의 특별 초청으로 귀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중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들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고 고집하지 말고, 더욱 이해의 정신으로써 어떻게 하면 굳은 제휴를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말한 '사소한 문제'는 식민지배 문제였다. 더 이상 이 문제로 대립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박정희는 성명 후반부에서도 "이곳 동경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6차 한일회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목적에 일치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제6차 한일회담의 순조로운 진행은 한일 양국이 앞서 언급한 '사소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굳은 제휴를 추구하는 일'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를 만족시켰다. 이 회담에 관한 각종 문서를 정리한 안소영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의 논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일본 방문(1961.11.11~12)'에서 자세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2007년 <일본 공간> 제2호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도착 당일의 환영 만찬장에서 박정희는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들추어낸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며 "차라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서 공동 이념과 공동 목표를 위하여 친선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답사를 발표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들추어내는 일'로 폄하한 것이다.

그는 다음날(11월 12일) 정상회담 때는 과거사 문제를 경제협력과 연관시키는 데 동의했을 뿐 아니라 이케다 총리에게 차관 제공까지 요청했다. 사과받고 배상받는 문제를 논할 자리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말한 것이다.

위 논문은 "보도된 합의사항 중 주목을 끄는 것은 '경제협력 문제도 청구권 문제와 관련시켜 국교 정상화 전에 논의한다'는 항목과 '박 의장 요청으로 무상원조 대신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부분이다"라고 한 뒤 "중요한 문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적 의미를 갖는 청구권 문제의 위상이 점차 축소되고 그 대신 경제협조 즉 경제협력 방식이 협상의 중심에 놓이는 양상으로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1961년의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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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왼쪽)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오른쪽). ⓒ 오마이뉴스

 
이렇게 박정희는 일괄타결 혹은 그랜드 바겐을 통해 식민지배 죄과를 부각시키지 않음으로써 일본 정부를 크게 만족시켰다. 이케다 총리는 "99.9%의 합의"라는 표현을 써가며 만족을 표했을 정도다.

박정희·김종필이 일본 정부를 흡족케 해준 일은 식민지배로 고통 당한 한국인들에겐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격렬히 반발했고, 박정희 정권은 이 저항을 힘으로 억눌렀다. 결국 1965년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21년 7월. <마이니치신문>의 한일정상회담 검토 보도에 청와대는 "도쿄올림픽 개막식 참석 여부는 정해진 바가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단, "마지막까지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이다. 한일정상회담과 그 성과가 예견된다면 방일을 검토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스가 총리는 8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에서 개회식에 누가 참석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문 대통령이 방문한다면 외교상 정중하게 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피해왔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약식으로 열릴 가능성이 점쳐진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환대를 받는 방법은 1961년에 박정희가 걸은 길을 답습하는 것뿐이다. '1961년식 방일'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다. 지금은 2021년이니까. 뿐만 아니라 한국의 위상과 집권세력의 역사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도쿄 올림픽 #한일관계 #한일정상회담 #한일회담 #그랜드 바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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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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