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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할 땐 꼭 다른 사람 같아"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모국어를 쓸 때와 외국어를 쓸 때, 인간의 판단이 달라진다

등록 2021.07.12 13:26수정 2021.07.1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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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pixabay

 
"사람들이 내가 한국어, 영어, 독어를 할 때 각각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대요."
"한국어를 할 때는 감정의 동요가 큰 편이에요. 그런데 친구가 말하길 프랑스어를 할 때의 나는 굉장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된대요."
"일 때문에 영어로 쓴 이메일로 주고받았는데 나중에 내가 여자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더라. 남자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샘 해밍턴 "(내가 한국어도 잘 하긴 하지만) 모국어인 영어로 말하면 완전히 날아다닌다. 영어로 말할 때는 명MC인 유재석 같다는 평을 듣는다."



나는 서울말 말고 다른 지역의 방언은 구사하지 못하는데, 친구들이 나와 서울말로 대화하다가 고향 친구나 가족의 전화를 받고 갑자기 유창한 지역 방언으로 바꿔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

2개국어까지는 아니더라도 1.5개국어 구사자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사용하는 단어, 톤, 뉘앙스가 전부 바뀌면서 친구의 또다른 페르소나가 느껴진다. 친구들뿐 아니라 방탄소년단의 멤버들이 고향 방언을 쓸 때도 미묘하게 좀 달라 보인다. 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고 편안해 보이는 듯하다.

나랑 영어로 천천히 예의 바르게 대화하던 이탈리아인 친구는 가족의 전화를 받는 순간 감정과 높낮이가 풍부한 이탈리아어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대화를 내가 기록한다면 "!! ?? !!!! ? !!!"가 될 듯하다.

지난 칼럼에서 무려 73개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고 전해지는 볼로냐의 추기경 메조판티가 언어를 바꿀 때의 느낌을 묘사한 말을 인용했다.

"초록색 안경을 끼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이 초록색으로 보이셨을 겁니다. 제 경우도 딱 그렇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러시아어를 이야기할 경우, 러시아어의 색안경을 낀 것과 마찬가지여서 제 생각도 오로지 그 언어로만 보입니다. 다른 언어로 넘어가려 한다면, 저는 그저 색안경만 바꾸면 됩니다."


이렇게 이중언어구사자, 다언어구사자들은 코드 전환(code switching)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성격을 갖게 되는 느낌이라고 한다. 연구들에 따르면 실제로도 그렇다고 한다. 다른 페르소나를 갖게 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모어(모국어)와 외국어의 차이, 각 언어 간의 차이, 언어를 배울 때 개인적 배경의 차이 등을 들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모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다룬다.

외국어 구사 능력을 부럽게 바라보는 요즘 사람들로서는 놀랄 일이지만, 수십 년 전 유럽에서는 이중언어, 다언어 사용이 조현병(정신분열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백안시했다(언어를 바꿀 때마다 인격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이것이 정신증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언어 사용은 조현병의 원인이 절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다언어구사는 조현병 치료에 유리할 가능성이 있으며, 조현병 환자의 인지적 재활을 위해서도 외국어 익히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모어 vs. 외국어, 달라지는 페르소나

영국의 정신 의학자 드 줄루에타(F. de Zulueta)가 만난 조현병 환자 한 명은 영어 원어민이었으나 드 줄루에타가 스페인어를 한다는 걸 알자 자기도 스페인어로 말했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말하자 그의 망상과 환각이 모두 사라진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다른 사례들에서도 환자들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떠올리거나 망상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사용된 언어는 모어였다. 덜 사용하고 나중에 배운 언어를 구사할 때는 망상이 사라져버렸다. 환청은 오직 모어로만 들렸다. 게다가 외국어를 구사할 때 환자는 자신이 환청을 듣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지만, 모어를 구사할 때는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순순히 시인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모어로 말하고 생각할 때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해짐이 드러났다. 모어로 생각할 때, 잠재적 손실과 잠재적 이득을 중립적으로 계산하기보다는 위험과 손실을 회피하는 쪽으로 편향되는 것이다. 반면 외국어를 사용할 때는 더 분석적이고 덜 치우치고 더 종합적인 사고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예를 들어 <100%의 확률로 1억 원 받기>와 <50%의 확률로 10억 원 받기> 중 선택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100% 1억>의 기댓값은 1억이고 <50% 10억>의 기댓값은 5억이다. 나의 경우, <50% 10억>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어차피 공돈이 아닌가!) 그런데 <50% 10억>을 골랐다가 꽝이 나오면 '아이고... <100% 1억> 고를 걸!'이라는 속쓰림이 생길 수 있다. 바로 이 상실감이 모어로 생각할 때와 외국어로 생각할 때 다른 크기로 느껴지는 것이다.

모어로 생각할 때는 <100% 1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고, 외국어로 생각할 때 <50% 10억>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모어로 사고할 때는 아기 때부터 축적된 모든 감정의 그물망이 함께 활성화되므로 위험 회피의 성향이 강해지고, 외국어로 사고할 때는 전두엽을 많이 활용하게 되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된 사고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을 밀쳐 떨어뜨려서 다섯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밀칠 것인가 말 것인가? 분석적으로 생각하면 한 명의 목숨보다 다섯 명의 목숨이 더 가치 있으므로, 밀치기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죄 없는 누군가를 내 손으로 적극적으로 밀쳐서 죽인다는 죄책감을 회피하려는 성향 때문에 밀치기를 선택하는 비율은 소수에 그친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아마 예상할 수 있겠지만, 모어로 물었을 때와 외국어로 물었을 때 답변 선택 비율이 달라졌다.

모어로 물었을 때는 17%만 옆 사람을 밀어서 다섯 사람을 구한다는 대답이 나왔는데, 외국어로 물었을 때는 40%가 밀치기를 선택했다. 모어로 생각할 때보다 외국어로 생각할 때 더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변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외국어로 생각하여 감정의 폭풍에서 벗어나기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의혹을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나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내가 지지하고 사랑하던 정치인, 한국에서 남자 페미니스트 단 한 명을 꼽으라면 꼽힐 바로 그 사람, 아들을 키울 때 롤모델로 삼고 싶었던 사람이 어쩌면 이럴 수 있나...

그러다가 프랑스인 친구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성추행, 성희롱을 법적인 개념으로 만들고 일본군 '위안부'라는 전쟁범죄, 성착취 문제에 대해 선두에 서서 싸우고 평생 약자 편에서 인권변호사로 살아왔던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본인이 성추행 의혹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난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그런데 영어로 저렇게 말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저 말을 외국어로 털어놓는 과정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저절로 터득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친구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로 친구가 어떤 말을 할지 이미 알았다. 곧이어 친구 입에서 내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대답은 바로 이랬다.
"어, 나도 이해해.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어... 어느 나라에나 있어."

불편한 외국어로 말할 때는 모어와 얼기설기 얽혀 있던 그 복잡하고 거대한 감정에서 풀려나 사건의 핵심을 간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걸 느꼈다. 이 사건에서 박원순을 빼고 보면, 박원순에 대한 내 감정을 빼고 보면, 그럼 너무나 명쾌했다.

'어느 나라에서 페미니스트 인권변호사로 알려졌던 사람이 사적으로는 성추행을 저질렀다더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런가보다, 그런 사례들 꽤 있지'하고 넘어가게 될 뿐이다. 이성적으로는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믿지 않고 싶어 하던 건 박원순을 지지하던 내 감정적 자아였다.

모어로 말하고 생각할 때는 감정이 풍부해지고, 외국어로 말하고 생각할 때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감정적인 판단이 꼭 비합리적이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진화해온 데에는 이유가 있고, 때로는 직관이 옳은 길을 비추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에 너무 휩쓸려 있다고 느낄 때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싶은 경우, 외국어로 한 줄 한 줄 적어내리면서 각 결정의 장단점을 꼽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제네바 #한국어 #외국어 #모어 #이중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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