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5 11:37최종 업데이트 21.07.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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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하는 일인자들에겐 저마다 나름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 평가받는 방송인 유재석이 그렇고, 열정과 체력 그리고 기량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어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자리매김한 손흥민이 그렇습니다. 그들이라고 처음이 없었겠습니까만, 남들이 짐작하기 힘든 노력을 쏟아부어 자신만의 영토를 튼실히 구축했습니다.

기실 이런 능력자들은 어느 분야나 있기 마련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선천적 능력치를 과신해 땀을 아끼면 결코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뭔가를 움켜쥔양 으스대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움켜쥐는 동작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이미 손 안에 무언가가 있길 바라는 건 기막힌 노릇입니다. 내게 남들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없다 싶으면, 시간을 더 쏟는 게 유일한 타개책입니다.


영국은 많은 명품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중 몇몇은 아주 강력합니다.
버버리(Burberry)가 1924년 선보인 특유의 체크 패턴은 곧 시그니처가 되었고, 브랜드가 승승장구하는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폴스미스(Paul Smith)가 1997년 만들어낸 '멀티스트라이프 패턴(Multi-Stripe Pattern)'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인 디자인 철학으로 남았습니다.

버버리와 폴스미스만큼이나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는 브랜드가 바로 던힐(Dunhill)입니다. 1893년 알프레드 던힐(Alfred Dunhill)에 의해 런던에서 탄생한 이래, 선 굵은 남성용 아이템을 생산하며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를 굳힌 지 오래입니다. 이를테면 3인 3색인 셈입니다.
 

만년필 클립에 찍힌 던힐(DUNHILL) 브랜드 로고 ⓒ 김덕래

 
가업인 마구(馬具) 용품을 판매하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 자동차 액세서리로 발을 넓혔고, 의류에 이어 담배 파이프 및 라이터를 생산하며 점점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요즘은 사회적으로 금연이 권장되다 보니 흡연인구가 많이 줄었습니다만, 한때 라이터는 그 사람을 표현하는 상징물처럼 여겨졌습니다.

듀퐁(Dupont)이 독특한 개폐음으로 개성을 표출했다면, 지포(Zippo)는 어지간히 바람이 불어도 잘 꺼지지 않는다는 그만의 메시지가 강렬했습니다. 던힐 라이터는 심플하고 슬림해 수납성이 좋으면서도 고급감이 뛰어나, 술자리에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꽤 오래 속이 쓰렸을 아이템입니다.

오늘날 던힐은 만년필계 최강자인 몽블랑과 함께,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리치몬트 그룹 산하에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만년필만 생산하던 브랜드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만듦새가 좋고 절제된 디자인이 매력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야무지게 만들었대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하릴없이 펜촉이 휘고 맙니다. 이 펜은 단종된 지 오래인 빈티지 만년필이고, 닙은 14K입니다. 펜촉의 형상이 전체적으로 얇고 뾰족하며 부드럽습니다.

통상 스틸촉은 두껍고 딱딱해 어지간한 필압이나 작은 충격은 버텨줍니다만, 이 정도라면 얘기가 다르지요. 견뎌내지 못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금촉은 필압을 잠시 과하게 주는 것만으로도 닙밸런스가 어긋날 수 있으나,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90도가 넘어가는 휨변형을 참아낸 거라 보는 게 맞습니다.
 

추락의 충격으로 심하게 휜 펜촉 ⓒ 김덕래

 
구부러진 펜촉을 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힘조절입니다. 당구를 칠 때 힘이 부족하면 원하는 만큼 내 공이 굴러가지 않습니다. 붉은 공 두 개를 다 맞혀야 하는데 낭패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강하게 밀어 치면 더 곤란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굴러 상대방 공까지 건드리면 벌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년필 수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일인자를 부러워할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그뿐입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펜촉을 펴나가는 과정 ⓒ 김덕래

 
작년에 못 간 여수 가족여행을 올해는 꼭 가려 했는데, 이 어수선한 시국에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듯해 또 취소했습니다. 아이들의 실망이야 말해 뭣하겠습니까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 멈춰야 할 때를 가르치는 것도 자녀교육의 일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손 본 펜에 잉크를 주입하고 흐름을 테스트 한 종이를 보니, 마치 여수 앞바다 잔물결만 같습니다.
 

마치 바다의 잔물결을 연상케하는 시필과정 ⓒ 김덕래

 
벌써 이십 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팔월이 가까워지면 대학을 갓 졸업했던 그 시절 여름이 떠오릅니다. 달랑 선풍기 한 대로 버티기엔 한낮의 옥탑방 열기가 너무 뜨거워, 예정에 없던 부산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전에서 하루, 또 대구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부산에 도착하는 일정은 무모했습니다.

다만 옥탑방을 벗어났을 뿐, 도로 위는 더 불볕이었습니다. 그늘 한 조각 없는 아스팔트 위에선 끊임없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습니다. 어찌어찌 천안을 지나 조치원에 다다르니, 길 양쪽으로 복숭아 노점이 즐비합니다. 문이랄 것도 없는 천막을 들추고 아무 가게나 들어갔습니다. 이모뻘 되는 아주머니가 복숭아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한두 개도 파시냐 물었더니, 대뜸 큼지막한 복숭아 하나를 뽀드득 소리가 나게 물에 씻어 건넵니다. 잘 익어 달디단 복숭아를 허겁지겁 먹고, 하나만 더 파시라 했지요. 아무 말 없이 검정 비닐봉지에 대여섯 개가 넘는 복숭아를 담아, 자전거 핸들에 걸어줍니다.

"딱 보니 아직 학생티도 못 벗었구먼. 팔긴 뭘 팔아. 그냥 가져가요. 이 날씨에 부산까지 간다고? 쉬엄쉬엄 가요. 급히 가다간 이 더위에 쓰러져."

봉지에 담긴 복숭아가 너무 많아 한쪽으로 핸들이 기우니, 같은 봉지에 비슷한 양을 또 담아 반대편 핸들에도 걸어줍니다. 경비가 부족하던 참이라 염치없이 그 호의를 날름 받았더랬습니다. 체력이 바닥나 결국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그새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또 아이도 생겼습니다. 예전 끝맺지 못했던 부산행을 마무리 짓고 싶어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혹시나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만류합니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아 며칠 창밖만 바라봤더니, 그렇게 소원이면 더 나이 들기 전에 다녀오랍니다.

아내 마음이 바뀔세라 서둘러 길채비를 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천안을 지나 조치원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그 가게 생각에 머릿속이 분주합니다. 벌써 오륙년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 그 자리에 있으려나? 혹시 주인이 바뀐 건 아닐까? 내가 못 알아보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바빴습니다.

단숨에 내달려 예전 그 길가에 다다르니,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이렇게 조금도 흐르지 않았을까요? 멀리서 봐도 예전 그 자리, 그날의 노점 모습 그대롭니다. 천막 사이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얼굴도 그때와 똑같습니다. 근처 마트에 가 제일 큼지막한 선물세트를 샀습니다. 그때보다 좀 더 나아진 형편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몇 년 전 단 한 번, 잠시 만났던 인연일 뿐인데 어찌나 각별하게 느껴지던지요.

허리 굽혀 인사하고 몇 마디 건네자 나를 기억해냈는지, 그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푸근하게 웃습니다. 나는 마치 오랜 인연 대하듯 그간의 근황을 전했고, 그는 나보다 더 환한 미소로 답했습니다. 또 봉지에 복숭아를 담아주길래 이번엔 꼭 돈을 받으시라 건넸더니, 아이 과잣값 하라며 다시 쥐여줍니다.

그렇게 복숭아를 먹어가며 예정대로 부산행을 마치고 올라온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났습니다. 이젠 그 장소에 다시 가도 알아보기 힘들겠다 싶으니, 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을까 후회가 됩니다. 그날 내가 받은 배려와 호의를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을 나눔 하는 것이겠지요.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없다, 낙담하지 마세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됩니다.

어찌나 잘 익었던지, 이 만년필보다 더 금빛이던 그날의 복숭아는 내 인생 최고의 열매였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여름휴가를 못 가지만, 그래도 아쉽지 않습니다. 내년이 또 있으니까요. 올 휴가는 집에서 에어컨 바람 쐬고 복숭아 먹으며 그렇게 보내렵니다. 꼭 멀리 떠나야만 피서는 아닐 테니까요.
 

잘 손봐진 던힐 빈티지 금장 만년필 F촉 ⓒ 김덕래


* 던힐(Dunhill)
- 1893년 '알프레드 던힐(Alfred Dunhill)'에 의해 탄생한 영국의 토탈 패션 브랜드. 선굵은 남성용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으며, 의류뿐 아니라 가죽, 패션 액세서리, 필기구 등 다양한 라인업을 갖고 있음. 국내엔 듀퐁, 지포와 함께 명품 라이터 생산업체로 잘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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