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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30년 추억 품어준 서울극장, 고맙고 미안하다

[아듀! 서울극장] 영화 예매하려고 2시간 줄 서기도, 추억의 뒤안길로

21.08.04 12:08최종업데이트21.08.0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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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코로나19로 힘든 요즘, 비보가 하나 날아들었다. 바로 종로3가 서울극장의 영업 종료 소식. 극장계의 공룡이라는 CGV도 매각설이 있을 만큼 코로나19로 힘든 극장가이지만 막상 서울극장의 폐관 소식을 들으니 착잡했다(한국상영관협회는 서울극장이 8월 31일 영업을 종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나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볼 걸 하는 후회와 함께 그동안 서울극장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울극장, 서울의 중심 
 

서울극장 정면 모습 ⓒ 합동영화주식회사

 
처음 서울극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초 중학생 때였다. 나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만 마치면 집에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 종로3가로 향했다.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시험 마지막 날 종이신문의 광고란을 통해 상영 영화와 시간을 확인할 때 느끼던 그 설렘. 난 아직도 <데몰리션맨>과 <리쉘웨폰>을 봤던 서울극장을 기억한다.
 
당시 종로3가에는 서울극장 말고도 단성사, 피카디리극장이 있었지만 나는 서울극장을 고집했다. 서울 사람이니까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작용했지만, 당시 서울극장이 더 신식 건물이었으며, 내 기준으로 서울극장이 재미있는 영화를 더 많이 상영했다.
 
단성사가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피카디리극장이 그 앞의 영화배우들 손자국을 내세워 유혹해도, 난 서울극장과의 의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물론 피카디리극장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접속>이 개봉됐을 때 조금 흔들리기도 했지만.

지하철 5호선도 개통되지 않은 시절, 강서구 화곡동에서 종로3가까지 가는 길은 중학생에게 절대 녹록지 않았다. 화곡동에서 62번 좌석버스를 타고 시청 앞에서 내려 광화문을 거쳐 종로를 걷는 발걸음은 서울이란 대도시를 탐험하는 일이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을 공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종로3가 서울극장은 그 모험의 마지막 종점이었다. 종암동 큰집을 가기 위해서 가끔 거치는 동대문이나 청량리도 궁금했지만 나의 도보여행은 항상 종로3가에서 마무리되었고, 난 그 용감한 여행의 보상으로 영화를 봤다. 
 
종로3가 서울극장은 내게 단순히 영화를 보는 극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울 중심부의 표상으로서, 내가 서울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랜드마크였으며, 10대 중학생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인지해 나가는 탐험의 주요 거점이었다.
 
90년대 말 서울극장
 
90년대 말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극장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점차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서울극장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우선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종로3가, 충무로 등의 극장가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서울극장은 좋은 영화를 만족스럽게 보고 싶으면 찾는 공간이었다.
 

98년 당기 개봉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필름

 
1998년 2월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영화 <타이타닉>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연애 중이던 난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서울극장에 줄을 섰고, 그 결과 오전 10시대 영화를 본 뒤 여자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현장 예매를 위한 2시간 넘는 기다림. 그것은 영화와 관련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여자 친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노력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의 아내도, 다른 지인도 그 당시 연애를 했었고, 영화 <타이타닉>을 보기 위해 다들 서울극장에서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서울극장은 청춘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또한 서울극장은 당대 영화의 중심지였던 만큼 주연배우들이 팬 사인회를 주로 열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영화가 개봉하면 배우들이 팬 사인회를 한다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만, 90년대 말만 해도 그럴만한 공간이 얼마 없었던 만큼 팬 사인회 자체가 낯선 풍경이기도 했다.
 
대학동기 A와 함께 내가 1998년 5월 서울극장을 찾은 건 영화 <토요일 오후 2시>의 주연 배우 이승연의 사인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열성 팬이었던 A는 아침 9시부터 줄을 서서 2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바로 자기 순서에서 행사가 끝나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아직도 술자리에서 안주로 올리는 그날의 추억 역시 당시 서울극장의 위상을 보여준다. 서울극장은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 문화의 코어였다.
 
아듀, 서울극장
 

서울극장 홈페이지 ⓒ 합동영화주식회사

 
서울극장의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건 2000년대 초반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였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표를 예매해는데 아무도 서울극장을 찾는 이가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집안에서 영화 예매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게가 집 가까운 멀티플렉스로 갔다.
 
그래도 극장 하면 서울극장을 떠올리던 나였지만, 더 이상 현장 예매를 고집할 수 없었다. 집에서도 가까운 멀티플렉스는 더 크고 쾌적했으며, 다양한 서비스들과 연계되었다.
 
가끔 서울극장을 찾았지만 그것은 절찬리에 상영하는 영화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서울극장 등에서만 개봉하는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를 보기 위함이었다. 서울극장은 더 이상 잘 나가던 그때 그 시절 극장이 아니었다. 대신 묵묵하게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안고 갈 길을 가는, 그래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그런 극장이었다.
 
서울극장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정겹기도 했다. 그것은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우리 세대의 모습이기도 했고, 그렇게 기억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시대의 표상이기도 했다.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주인공 살바토레가 마지막에 영화를 보며 울먹였던 그 공간처럼 서울극장은 존재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서울극장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한다. 단성사처럼 역사관으로 남을지 피카디리극장처럼 멀티플렉스로 다시 태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동안 오롯이 짊어지고 있었던 세월의 무게를 뒤로하고 폐관된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만 아쉽기만 하다.
 
종로3가에서 나의 30년 동안의 기억을 함께 품어주었던 서울극장. 고맙고 미안하다. 이젠 안녕!
서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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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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