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남북접의 노선차이 있었으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32] 남접의 강경론에 비해 지도부가 속한 북접은 온건한 방법으로 뜻을 이루자는 것이다

등록 2021.07.23 17:39수정 2021.07.23 17:39
0
원고료로 응원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아 동학을 민중 속으로 더 넓게 전포한 해월 최시형 선생 (이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당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1900년에 몸통 부분을 편집하여 제작한 사진이다) ⓒ 박길수

 
최시형은 보은집회 때 지도부와 각 접주들의 회의에서 교조의 신원과 함께 정부의 부당한 탄압을 비판하는 내용의 「신원금폭소」를 조정에 제출하였다. 뒷 부분이다. 

갑자년 3월 10일에 대구에서 동학을 금지하고 교조를 처형하니 지극히 원통하고, 그 고통으로 인령이 처절하고 천지가 참담하였다고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모(某) 등이 피를 머금으며 눈물을 마신 지 어언 30여 년이 되었으나 신사의 지극한 원한을 아직 펴지 못하였습니다. 예전 금영(錦營)에서의 원통함을 외치던 것과 삼례에서의 호소는 오로지 신원금폭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혼탁한 세상에 엷은 풍속이 아직도 그 진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항상 동학을 지목하여 당파로 배척하여 공사를 빙자해 사리를 영위하매, 돈과 재물을 토색질하고 아버지를 매어 자식을 체포하매, 집을 헐어 재산을 탕진하니 동학이라 이름 붙은 자는 거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러 부녀의 목숨이 부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대개 동학이라는 이름은 특별히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가 생전에 동방에서 나아서 동학에 거하여 동학의 이름을 불렀고, 서양에서 들어오는 학문을 대칭한 것이거늘, 뜻하지 않게 금일 다시 동학의 탄압이 일어나서 도리어 서학의 왼팔을 도우니, 유유한 푸른 하늘아! 이 어느 사람이 옳단 말입니까. (주석 13) 

교조의 신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사를 차병하려다 여의치 않자 관군을 보내 보복에 나섰다. 그동안 온건한 방식으로 교조 신원과 동학 공인을 추진하려던 최시형과 지도부는 방법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태도와 호남쪽의 거사가 진행되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의 모습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역사공간

 
동학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장되면서 경기ㆍ강원 지역의 북접과 삼남지역의 남접간에 노선상의 이견이 나타났다. 남접의 강경론에 비해 지도부가 속한 북접은 온건한 방법으로 뜻을 이루자는 것이다. 

북접 교단은 농민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차원에서 농민봉기를 묶어두려 했다. 그것은 그전의 일련의 집회 기간에도 꾸준히 지켜온 입장이었다. 그나마 대중집회를 개최해도 교단 내 강경파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정도였고, 대외적 명분도 교조신원에만 국한하여 동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데만 노력했다. 

이 점은 동학이라는 종교운동의 특성에서 기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동시에 북접 교단지도부가 대체로 최하 빈농층보다는 부농과 중농의 입장을 반영하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와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대결보다 유화적인 국면에서 타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것이 극명하게 나타났던 것이 북접의 보은집회와 전봉준 주도의 원평집회에서였다. (주석 14)

이 시기 최시형은 교단에서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보은집회 때의 모습이다.

이튿날 대신사가 보은 장안에 이르자 각 포의 교도들이 바람이 불고 조수가 밀려오며 구름이 몰려오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듯이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각기 장대를 내걸어 깃발로 삼았고 돌무더기를 모아 성채를 만들었으며 읍양하고 진퇴함에 위의(威儀)가 바로 섰으며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움에 화기가 잘 어울렸다. 

이에 대신사가 명령하여 각 포의 대접주를 임명하고 포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충경(忠慶)대접주 임규호, 청의대접주 손천민, 충의 대접주 손병희, 문청대접주 임정재, 옥의대접주 박석규, 관동대접주 이원팔, 호남대접주 남계천, 상공대접주 이관영 등이었다. 

그리고 묘당(廟堂, 의정부의 별칭)에 건백(建白)해서, 기어코 선사(先師)의 원통함을 풀려고 열흘이 넘도록 해산하지 않았다. (주석 15)


주석
13> 이수광, 『우리도 몰랏던 근대사의 비밀』, 290쪽, 북오션, 2014.
14> 우원,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238쪽, 창작과 비평사, 1993.
15> 「시천교종역사」,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1) 』, 281쪽,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3.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인기기사

  1. 1 "하필 대목에 와 오노" 윤석열 방문에 뿔난 상인들
  2. 2 조선일보는 절대 보도하지 않는 K방역의 실체
  3. 3 '대구가 대구했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한 이유
  4. 4 양세형이 윤석열에 물었다 "대통령만 보면 싸우고 싶나?"
  5. 5 김일성대학으로 간 아버지, 남한에 남은 가족의 선택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