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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른 길의 진화를 보여주는 말재 고갯마루

등록 2021.07.20 14:08수정 2021.07.2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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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군 임실읍과 오수면의 경계를 이루는 성수지맥(聖壽支脈)을 넘어가는 임실의 말재는 조선시대에 중요한 길목이었다. 여름 제철 과일이 풍성해지는 대서(大暑) 절기를 며칠 앞둔 7월 18일(일요일), 말재의 고갯길과 고갯마루에서 보이는 풍경 속을 걸으며 역사와 설화를 찾아보았다. 
 

말재 고갯마루 마애선정비 말재의 고갯마루에는 다섯 기의 마애선정비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 이완우

 
이 말재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온다. 16세기 초 경기도 파주에 살던 부인 한 분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먼 길을 와서 이 말재 고갯마루에 섰다. 부인은 연꽃잎을 바람에 띄우며, 그 연꽃잎이 내려앉는 곳에 살아갈 터를 잡자고 두 아들에게 말하였다.

그 연꽃잎은 고갯마루에서 시오리(十五里)를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노산 자락 어은리에 곱게 내려앉았다고 한다. 그곳에 터를 잡아 500년 가까이 번영한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른다. 이 전설은 오수 분지가 땅이 기름지고 인정이 좋아서 살기 좋은 터전이었음을 암시한다.


말재의 고갯마루에는 다섯 기의 마애선정비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마애선정비 바위가 고갯마루의 이정표였을 것이다. 고갯마루에서 둔남천 방향으로 골짜기를 따라 곧바로 내려오는 옛날의 고갯길이 있었다. 그 옛 고갯길의 흔적은 희미해졌으나, 말재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역사와 설화를 생생하게 이야기해 준다.

신작로, 근대 문화유산의 가능성

신작로(新作路)는 철도와 더불어 구한말과 일본 강점기에 수탈의 길로 출발하였다. 말재를 넘는 신작로는 수십 년간 17번 국도였다. 말재 고갯마루에서 오수면 방향으로 내려오는 고갯길은 요즘 보기 힘든 예전 신작로의 모습이다. 

숲속으로 비포장 자갈길은 3km 구간이다. 1970년대 초부터 임실역에서 삽재를 넘어 성수면 월평리를 경유하는 도로가 확장되고 활성화되면서, 말재의 신작로는 17번 국도의 지위를 삽재를 넘는 도로에 넘겨주고, 격동의 역사를 전개하던 주요 도로의 기능을 마감하게 되었다. 
 

말재 옛길 흔적 고갯마루에서 둔남천 방향으로 골짜기를 따라 곧바로 내려오는 옛날의 고갯길이 있었다. ⓒ 이완우

 
이 말재 고갯길이 비포장 신작로로서 시골길의 정취가 느껴져서, 한때는 영화 촬영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관심도 적어지고, 금속성 전봇대가 줄지어 설치되어 신작로의 정취와 풍광을 잃어버렸다. 이 신작로를 근대문화 유산으로 보존하여 역사의 교실과 둘레 길 걷기 코스로 활용하면 어떨까?
  
조선시대에 큰 고개 아래는 으레 원(院)이 있어 여행하는 관리와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말재 아래에 평당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 평당원에 홍길동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소설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 때에 기록이 보이는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실존 인물 홍길동이 활동하던 시대는 봉건 질서와 신분 차별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훈구파를 비롯한 지배층들은 토지 겸병의 탐욕을 부리면서 농민들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 고통 받았다. 이 시기에 홍길동의 부대가 활빈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정에서 홍길동과 그 부대를 체포하려 하자, 장성에서 호남정맥을 넘고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이곳 평당원까지 왔다가 지리산 방향으로 이동하였다고 전한다.
 

말재 신작로 말재를 넘는 신작로는 수십 년간 17번 국도였다. 숲속에 남아 있는 비포장 자갈길 3km 구간이다. ⓒ 이완우

 
구홧들에서 만나는 춘향전의 한 장면
 

구홧들 순우평 길목 평당원천(둔남천)을 따라가면 오수 역참(驛站)을 앞두고 구홧들이 펼쳐진다. 구홧들에서 한 모롱이 돌아가면 순우평이다. ⓒ 이완우

 
말재를 넘어 평당원을 지나고 평당원천(둔남천)을 따라가면 오수 역참(驛站)을 앞두고 구홧들이 펼쳐진다. 구홧들은 남원으로 진입하는 들머리로 고전 소설 춘향전의 무대가 된다.


이몽룡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땅으로 들어선다. 오수 지역은 조선 시대에 남원부에 속해 있었다. 이몽룡은 구홧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만나서 춘향이의 근황을 탐색한다. 이몽룡이 "요즘 춘향이가 변학도의 수청을 들면서 잘 지낸다며?" 하자, 농민들은 이몽룡에게 세정 모르는 소리 말라며 면박을 준다.

구홧들에서 한 모롱이 돌아가면 순우평이다. 춘향이의 편지를 가지고 한양으로 가는 한 어린 심부름꾼을 우연히 만난다. 이몽룡이 편지를 보자고 하니 아이는 당연히 거절한다. 이몽룡은 "행인임발우개봉(行人臨發又開封)"이라며 칠언절구의 당시(唐詩) 한 구절을 인용하며 윽박지른다. 어린 심부름꾼은 "몰골은 흉악하건만 문자 속은 기특하다"라며 편지를 건네준다. 편지 내용은 춘향이의 이몽룡에 대한 사모와 하소연이 가득하다.

어린 심부름꾼이 이몽룡의 칠언(七言) 문자 의미를 이해했다면, "이 편지 당신이 쓴 거요?" 하며 면박해야 옳다. 그런데 어린 심부름꾼은 문자의 의미도 모르면서 문자 속은 기특하다며 편지를 건네주고 만다. 이 장면은 해학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지만, 글 모르는 하층민을 대하는 양반의 모습을 언듯 보여주기도 한다. 
 

말재 길의 진화 말재 고갯마루에서 시대와 문명에 따라 진화하는 6가지 길을 하나의 풍경 속에서 볼 수 있다. ⓒ 이완우

 
말재 고갯마루에서는 시대에 따른 길의 진화를 본다. 흔적은 희미하고 이름으로 존재하는 말재 옛길. 근대문화 유산으로 보존하면 좋을 신작로. 교통량이 제법 많은 현역 17번 국도. 옛 전라선 폐선 부지를 활용한 농로. KTX가 달리는 현재의 철도. 터널과 고가도로를 힘차게 지나가는 고속도로.

말재 고갯마루에서는 시대와 문명에 따라 진화하는 6가지 길을 하나의 풍경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실의 말재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경 속을 걸으면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역사와 설화를 만날 수 있다.
#임실 말재 #말재 마애선정비 #평당원 홍길동 #구홧들 이몽룡 #임실 순우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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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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