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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 없다 했는데 비워진 공깃밥... 여름엔 이게 최고

황석어 젓갈에 양파와 청양고추만 있으면... 입덧 시절 시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음식

등록 2021.07.21 07:24수정 2021.07.21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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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잘 삭은 황석어 젓갈 시장에서 구입한 황석어 젓갈을 양념하기 위해 꺼내 놓았다. ⓒ 김정희

  
밭에서 청양고추를 한주먹 땄다. 적당히 매운맛을 품고 있는 이맘때가 먹기 딱 좋다. 된장 찍어 두 끼 정도 먹고 나니 뭔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 자꾸 밀려온다. 그런데 나는 그 허전함을 고추를 딸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황석어 젓갈을 먹는 일이다. 황석어 젓갈은 청양고추 송송 썰어 함께 얹어 먹어야 비로소 맛의 궁합을 이룬다. 물론 양파는 덤이다. 다른 때는 생각도 나지 않던 이 음식이 초여름에 접어들면 저절로 떠오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장마가 막 지나고 불볕 쏟아질 무렵엔 너나없이 기운이 빠지고 갑자기 다가드는 더위에 맥을 못 춘다. 입맛도 없는 것 같고 왠지 밥에 물 말아 대충 먹고 싶어지는 때, 그런 때가 요즘이다. 풋고추와 양파만으로 밥 한 그릇 대충 비우고 싶은 나른한 여름이 시작되었다.
  

시장에 가면 볼 수 있는 황석어 젓갈 ⓒ 김정희


황석어(黃石魚)는 민어과의 바닷물고기로 회색을 띤 황금색이고 입술은 불그스름하다. 주로 한국 서남해, 동남중국해 등지에 분포하며, 참조기를 말한다. 젓갈은 주로 5월에서 6월 사이에 담근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젓갈 담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그중 황석어 젓갈은 집마다 흔하게 담갔다.

햇빛 차단을 위해 부엌 안쪽이나 광에 두었다가 김장할 때 꺼내 쓰곤 했다. 작년에 담가두었던 잘 삭은 젓갈을 꺼내 이듬해 여름에 먹곤 했는데 짭조름한 그 맛이 바로 시들한 입맛을 잡아준다고 어른들이 즐겨 먹던 반찬이었다.

"안 되겠어. 조금만 사다 먹어야 건강한 여름을 날 것 같아!"

여름이면 늘 이런 작은 실랑이를 벌인다. 젓갈이 있으면 밥을 많이 먹게 되니 사는 걸 주저하다가 결국, 황석어 젓갈 맛에 지고 만다. 그래야 더위를 이겨낼 수 있다는 핑계를 이번 여름에도 앞세우고 만다. 입이 짧았던 나는 시어머니에게서 듣는 지청구가 있었다.


"그것 먹고 어찌 살 것어. 푹푹 좀 먹거라. 동서들 맨치로 암 것이나 먹어야 혀."

같이 살지 않았으나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 올 때마다 나는 기가 죽었다. 형님들처럼, 시누이들처럼 잘 먹고 싶었다. 처음에는 시댁에 적응하느라 그런가 보다 했던 어머니도 막내며느리가 입이 짧아서 그렇다는 걸 아셨다. 사실 생선은 시댁 식구 어려워 대놓고 못 발라 먹은 게 맞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내 앞으로 자꾸만 나물무침을 밀어주며 밥 잘 먹는 며느리를 기대하셨다.

그날 시어머니는 연락도 없이 오셨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막내아들네 집을 향해 길을 나선 것이다. 직행버스 두 번에 시내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는 동안 짐을 올리고 내리느라 힘들고 고단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짠하다.

"나다. 누구 없냐!"

혼자 있던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거기에는 쌀 포대가 부려져 있었고, 보따리 옆에 얼굴이 벌겋게 익은 어머니가 숨을 고르고 앉아 계셨다.

"어머니! 이 많은 것을 어떻게 다 들고 오셨어요. 연락하셨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요."
"새끼들 보러 오는디 뭔 연락여. 밥은 좀 먹는 것이냐."


요즘이야 미리 연락 없이 오는 시어머니를 이해 못 하는 세상이지만 전화도 없던 시절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시어머니라는 관계를 떠나 피붙이 그리웠던 나는 마치 친정엄마를 만난 듯 반가워 어머니를 부둥켜 안았다.

한가득 부려진 짐들을 보며 울컥, 눈물을 훔쳤다. 세상에 이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어떻게 오셨을까 싶기도 했고, 가뜩이나 입덧으로 힘들어하던 와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어서, 보따리 속에 든 고향의 냄새에 눈물을 쏟은 것이다.

쌀 20킬로 한 포대, 어린 배추 시래기, 애호박 한 개, 풋고추 몇 개, 조금씩 싸서 묶은 반찬 보따리 또 한 개.

평소 여장부라는 소리를 들으셨던 어머니. 그래도 그렇지. 그 많은 짐을 들고 막내아들네를 찾아오실 때의 마음이 어떠셨을지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나는 시어머니라는 생각을 지웠다. 그저 자식 입에 뭐라도 주고 싶어 당신 손으로 농사 지어 수확한 것들 챙겨 오신 누구나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부랴부랴 밥을 지었다. 새벽부터 길을 나섰을 어머니를 위해 솜씨를 냈다. 내가 봐도 젓가락 댈 곳 없는 밥상이었다. 내 딴에 최선을 다해 있는 반찬 모조리 꺼내 차렸으나 밥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제 입덧 핑계로 아들 굶기겠다' 생각하기 좋은 밥상 앞에 어머니는 당신이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황석어 젓갈이다. 버스에서 냄새날까 봐 많이는 못 가져왔다. 잘 삭았으니 밥에 올려 먹어봐. 입맛 찾기는 그만이다."

아! 황석어 젓갈. 엄마가 해주곤 했던 너무나 흔한 젓갈 반찬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많은 반찬 중에 하필 젓갈이람.'

그런데 잘 삭은 황석어 젓갈은 맛있었다. 입 짧은 것 맞나 싶게 자꾸 손이 가 밥 한 공기를 싹 비웠다.
  

총총 썬 청양고추와 황석어 젓갈이 먹음직스럽다 ⓒ 김정희

 
"어미야 그만 먹어라. 짜다."
"황석어 젓갈이 이렇게나 맛있는 반찬인지 정말 몰랐어요. 어머니."


황석어 젓갈은 입맛 없어 밥 못 먹는다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반찬임이 분명했다.

그 후로 황석어 젓갈은 초여름이면 늘 챙겨 먹는 반찬이 되었다. 흔하게 먹던 음식이 어떤 상황이나 현실에 처했을 때 전혀 다른 맛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황석어 젓갈. 삼십여 년 전 어떤 하루를 떠올리게 해주는 소중한 반찬이다.

결국, 시장에 들러 황석어 젓갈을 샀다. 청양고추도 양파도 준비되었다. 황석어를 꺼내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시장 아주머니께 팁으로 들은 물엿을 좀 넣고 양념을 했다. 예전에 시어머니가 무쳐온 양념 맛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먹는 여름 반찬이 된 황석어 젓갈은 입덧과 시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여름 반찬으로는 그만인 내게는 아주 특별한 음식이다.
 

갖은 양념을 해서 완성한 황석어 젓갈 무침 청양고추와 양파, 그리고 황석어 젓갈의 환상적인 궁합 ⓒ 김정희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초여름 #입맛 #황석어 젓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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