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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탑과 붉은 벽돌... 한양에 들어선 기이한 건물

자그마치 130년, 조선 최초 서양식 성당 약현성당

등록 2021.07.25 11:35수정 2021.07.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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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약현은 충정로에서 서울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예전 이 고개 마루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아 '약전현(藥田峴)'이라 하다가 이를 '약현'으로 줄여 부르며 굳어진다. 이곳에 조선 최초 서양식 성당이 들어선다. 이를 당시 사람들은 '문밖성당'이라 부른다. 도성 4대문 안 성당은 '문안성당'으로 오늘날 명동성당이다.
  

약현성당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약전현 언덕에 세워진 조선 최초 서양식 성당. ⓒ 이영천

 
주변부와 중심부는 이처럼 사람들 의식에 '차이'라는 선입견으로 자리하는가 보다. 문안이 양반들을 위한 공소라면, 문밖은 상민과 천인을 위한 공소다. 문안성당이 성모 마리아라면, 문밖은 성가(聖家)를 지켜낸 성 요셉이 중심이다.

수렛골에 자리 잡은 약현성당
  

세브란스 병원과 약현성당 1910년대 촬영된 남대문 앞 세브란스 병원과 주변 사진. 사진 죄측 중간부위 멀리 언덕 위에 보이는 건물이 약현성당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130살 나이의 성당이다. 이는 최초 서양식 성당이라는 건축사적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낮은 초가와 한옥 일색인 한양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설고 높다란 뾰족탑과 붉은 벽돌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벽사(辟邪,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를 뜻하는 붉은 색 기이한 건물로 여겨진다. 예수라는 유일신을 기리는 상징성과 높은 언덕에서 먼 곳을 굽어보는 불편한 시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선교 자유가 보장되자 가톨릭 신자가 급증한다. 이에 조선 교구는 종현(명동)본당에서 분리된 공소를 설치(1887)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렛골 공소다.

교구는 대지를 1887년 전후하여 구입한다. 공소는 4대문 밖 경기도와 황해도가 관할이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 강당을 짓고 하층민 위주로 가톨릭 교육을 시작한다. 1890년 즈음 강학을 받는 신자가 950여명에 이른다. 이게 바로 약현성당 탄생 배경이다.
 

서소문 순교자 탑 1800년대 각종 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는 헌양탑이다. ⓒ 이영천

   
성당이 이곳에 자리 잡은 연유는 조선인 최초 영세자 이승훈 집이 인접하고, 신유(1801)·기해(1839)·병인(1866)박해 때 밝혀진 98명 외 수많은 신자가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전통에 따라 순교지 인접 언덕을 선정하여 성당 건립을 준비한다.

1891년 10월 성당 건축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여 1892년 6월에 외부공사를 7월에 바닥공사를, 12월에 건축공사를 마무리 짓는다. 성당은 고딕 요소와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충·혼합된 벽돌조 건물이다. 고딕양식은 고난도 기술과 많은 공사비를 필요로 한다. 이에 절충 형을 선택하여 건축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聖) 정하상 바오로 약현성당으로 오르는 14처 동산 중간에 서 있는 성 정하상 바오로 동상이다. 품에 '상재상서'를 안고 있다. ⓒ 이영천

 
성당으로 들어서는 14처 동산을 오르다 보면, 한복을 입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품은 성(聖) 정하상 바오로' 동상이 반긴다. 1831년 9월 로마 교황은 가톨릭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조선교구와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긴다.

이 회는 울트라몬타니즘(Ultramontanism, 로마 교황의 권위가 국민적 주교단이나 세속 국가권력보다 높다는 점을 강조)을 따르는 '반 예수회'식 선교를 선호하는 단체다. 원리주의에 입각하여 선교지 전통이나 관습, 정치세력과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순교'를 각오한 선교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회'식 토착적 신앙변증을 수행한 신도가 바로 정하상이다.


정하상과 상재상서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려면,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가치관과 이념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런 변화가 딱딱하게 굳은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이다. 이의 수용과 실천은 전혀 다른 길을 찾아내는 빛이기도 하다. 물론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는 경우는 다반사다.

조선 상류층 명문가이면서, 실학과 가톨릭을 받아들인 집안이 있다. 이들은 성리학이란 관념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조선에 변화를 일으키고, 실사구시를 학문과 실천, 순교로 변증한다.

자생적 가톨릭 신서파(信西派)의 핵심인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와 그 후손들이다. 집안은 남인 시파(時派)다. 약전은 토착적인 찬송 '십계명가'를 지었고, 약용은 수원화성을 설계할 정도로 뛰어난 실학자다.
  

기해일기 1839년 기해박해 때 78명의 순교자 인적사항을 기록한 책. 특히 '당대의 목격 증언'이라는 점에서 정확한 순교 사적으로 평가받고 있음. ⓒ 이영천_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촬영

 
이 집안은 여럿 순교자도 배출한다. 형제 중 약종은 신유박해(1801) 때 서소문 성지에서 순교한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큰 아들 철상(哲祥)도 같이 순교한다. 그의 부인과 딸(정정혜)이 기해박해(1839) 때 역시 서소문에서 순교한다. 작은 아들 하상(夏祥)도 이들보다 조금 늦은 9월에 같은 곳에서 순교한다.

하상은 체포되자 우의정 이지연에게 '상재상서'를 올린다. 조선의 법률·관습·문화·정치·사회적 인식범주를 수용하면서 가톨릭을 변증·설득하는 논리를 편 글이다. 이는 가톨릭이 나서서 중국황제나 서양군대를 몰고 와 조선을 정벌하여 종교자유를 얻자는 '황사영 백서'와는 정 반대의 논리다. 서정민의 평(한국 가톨릭의 역사. p65∼66)이다.
 
'정하상이 남긴 큰 공헌의 하나는…(중략)…토착적 변증의 수용신학이 잘 드러나 있는 <상재상서>를 집필했다는 점이다. 그가 재상 이지연에게 올린 순한문 3,644자에 달하는 <상재상서>는 당시 유일한 호교론서(護敎論書)로서…(중략)…사실 이 신학적 변증서인  <상재상서>는 정하상이 체포되어 순교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집필해두었다가, 체포된 후 심문관을 통해 당시 재상 이지연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의 구성은 첫째, 보유론적인 견지에서 천주의 존재를 논하고, 천주십계(天主十誡)를 들어 가톨릭의 실천윤리를 설명하였다. 둘째, 호교론을 전개하여 천주교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였고 셋째, 가톨릭이 유교적 전통에 어긋난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올바르게 하는 미덕이 있음을 변증하여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벽돌조 성당의 표본으로
  

약현성당 정면 중앙에 선 높이 22m 종탑. 성당은 전체적으로 고딕 요소와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충·혼합된 벽돌조 건물이다. ⓒ 이영천

 
약현성당은 용산신학교를 설계한 코스트(E. Coste) 신부가 설계하고 청나라 기술자가 시공한다. 당시 조선 주임신부인 두쎄(Doucet)가 공사를 감독한다. 두쎄는 건물 착공 때부터, 설계자 코스트는 물론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세레딘-사바틴(A. I. S. Sabatin)의 자문을 받으며, 불철주야 공사에 매달린다.

성당규모는 길이 32m, 폭 12m다. 네이브(nave, 중앙 신자석)와 아일(aisle, 양측 통로)의 구분이 뚜렷하며 네이브 폭이 아일의 2배다. 내부 벽면 창은 단층으로 공중회랑(triforium)이나 고측창(高側窓, clearstory)을 따로 두지 않았다. 지붕 마감은 함석이다. 성당은 언덕에서 박해의 아픔이 서린 서소문 성지를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정면 중앙에 선 22m 높이 종탑이 1905년 세워진다. 종탑 하단 몸체엔 아치창 한 쌍, 그 아래에 둥근 장미 창 하나를 내었다. 내부는 긴 십자가형 삼랑식 구조로 외부에선 지붕이 조금 낮아 보이지만 실제로 천장이 무척 높고 장엄한 공간을 연출한다.
  

약현성당 내부 네이브와 아일, 팔각돌기둥과 벽돌로 쌓은 아치, 굽은 리브(Rib)로 이루어진 뾰족 볼트(Pointed vault)의 중앙 천장, 장식적인 구성을 한 양측 통로 천장의 목재 반원형 볼트(Barrel vault) 모습이 선명하다. ⓒ 문화재청

 
내부 열주는 8각 돌기둥으로 기둥 위는 반원형 아치 아케이드(기둥으로 지탱되는 아치 또는 그 아래 개방된 공간)이고 그 위에 천장이 있다. 중앙천장은 굽은 리브(Rib)로 이루어진 뾰족 볼트(Pointed vault, 아치 상부가 뾰족한 천장)이고, 양측 통로 천장은 장식적인 구성을 한 목재 반원형 볼트(Barrel vault)다.
  

성당 앱스(Apes)와 성 요셉 상 약현성당의 각진 앱스(Apes)와 그 앞에 서 있는 성 요셉 상이다. 앱스 3개의 스태인드글라스가 성당 내부 빛의 중심을 이룬다. ⓒ 이영천

 
제대 뒤편 세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성당을 밝고 화려하게 장식한다. 제대 좌우에 성 모자상과 성 요셉상을 모셨고, 좌우 벽에 14처가 걸려 있다. 1921년 남녀를 구분하는 내부 칸막이를 제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등 내장공사를 다시 한다.

1974∼1976년까지 성당 복원공사를 시행한다. 외벽을 수리하고 문짝 등을 교체했으나, 원형에 매우 충실한 복원이다. 성당으로서 기본적 공간배치와 형태를 갖추었음에도, 번잡스런 장식이 없고 매우 아담하면서도 장중하다. 우리나라 최초 성당으로,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현재 성당은 2000년 9월에 다시 지은 것이다. 1998년 2월 행려자 방화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방석에 불을 붙여 제대 쪽으로 던진 화재로 지붕과 성당 내부가 불에 타고, 첨탑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다행스럽게 곧 복원 공사를 시행, 2년 반 만에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문밖이란 편견이 만연한 자리에 들어선 하느님의 집이다. 높다란 종탑을 보며 세상과 사람들 의식에 큰 변화를 이끌어 온 힘을 생각한다. 온건하나 무척 강한 집념과 의지로, 자기가 믿는 신념에 죽음으로 화답한 그 정신의 길을 생각한다. 모든 변화를 이끌어 온 힘은 그런 고귀한 희생에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서소문성지 #성_정하상_바오로 #약현성당 #수렛골_공소 #상재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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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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