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저항운동 메카 영동군의 좌익, 해방 후 어떻게 죽어갔나

해방기 영동군의 정치·사회 현황... 농민운동 세력이 큰 지지 얻어

등록 2021.08.14 20:48수정 2021.08.15 09:27
3
원고료로 응원
 
a

1945년 8월 16일 서울 마포형무소 앞.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오?" "비탄리에서 우익들의 테러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답니다." 청년의 보고를 받은 장준(1894년생)은 간부들과의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비탄리에 실태조사단을 급파했다. 아래는 당시 실태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장에 갔던 이종(1911년생. 충북 영동군 영동읍 봉현리)의 증언이다.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이 시작되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자고 나자 간밤에 테러단이 민주부락인 비탄리를 습격하여 쑥대밭을 만들고, 부락책임자인 김기원이 구타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군 간부들과 가서 보니 집집마다 가정기물이 부숴지고 부락 사람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구타당한 채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 (이종, 「양심산맥으로 뻗친 우공 반세기」, 『끝나지 않은 여정』(대동, 1997)
 
1946년 10월 1일 우익테러단이 영동군 영동읍 비탄리를 습격, 주민들을 구타해 중경상에 빠지게 하고, 가옥을 파괴했다. 우익들은 대구 10월 항쟁에 자극받은 영동군민의 봉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습격 작전을 폈다.

우익테러단의 테러와 좌익의 불법화

이날의 테러는 비단 비탄리뿐만이 아니었다. 봉현리와 심원리에서도 벌어졌다. 영동읍 여러 마을에서 공격을 당한 '민주주의민족전선(아래 민전)' 회원들은 부상자들을 구세군병원에 입원시키는 한편 영동경찰서에 항의를 하러 갔다. 당시 테러단이었던 김치한(가명)은 해방 이후 우익의 좌익 테러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폭동이 일어나서 경찰이 왔다갔다하지, 테러하고 다니지, 서북청년이 테러하러 다니지 막 이러니까, 각 부락에 영동읍에 있던 이놈의 빨갱이들이 전부다 피신했다고. 여기서 시오리 떨어진 데 가면, 봉현리 예전리 탑선리라고 있다고. 전부 다 그리로 모였다고, 이것들이.
- (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충북 영동군 2008년 피해자현황조사 보고서>)
 
경찰서에 항의를 하러갔던 민전 회원들은 읍내의 민전회관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철둑에 매복해있던 테러단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민전 산하 민청(민주청년동맹) 회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읍내로 모여들었고 그때서야 우익테러단은 물러갔다.

우익의 테러, 좌익의 항의, 경찰의 발포, 우익의 테러로 마무리된 1946년 10월 1, 2일 상황은 언론에 의해 180도 바뀌어 보도됐다. 
 
영남 일대를 풍미하던 소요사건은 마침내 영동에도 파급하여 지난 (10월) 2일 하오 5시 좌익 청년 300여 명이 편방하여 국민회 간부와 우익청년단체 간부의 집을 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약탈 등 폭력행위를 감행하여 경찰서까지 습격, 접수코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주하여 버렸다.(<동아일보> 1946년 10월 15일자)
 
좌익 측은 일방적으로 테러와 피해를 당했는데도 이후 대거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해방 후 영동군의 대표적인 좌익 활동가로 명단은 아래와 같다.
 
장준(54세, 농업, 양강면 양정리), 장철(53세, 무직, 양강면 양정리), 송재웅(23세, 무직, 영동읍 계산리(본적 함양)), 박래원(21세, 자동차수리공, 영동읍 계산리), 오경순(31세, 운수부 서기, 영동읍 심원리), 김태수(42세, 농업, 영동읍 매천리)
 
10월 사건과 관련해 장준은 용산면 청화리에서, 그리고 이종은 청주에서 체포되었다. 장준을 포함한 20명은 서울 변호사단의 지원을 받아 1947년에 전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당시 청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장준의 감방은 충북경찰학교 학생들의 반공교육 현장 방문 코스였다고 한다.

영동군은 저항운동의 메카

충북 영동군에서는 해방 후 어떻게 조선공산당이 신속히 조직되고, 민전회관을 근거지로 해 10월 항쟁 등 다양한 활동이 펼쳐질 수 있었을까? 
 
8월 15일 아침나절인데요, 중학생 두 명이 찾아와서 쪽지를 전해주는 겁니다. 해방이 되었으니 즉시 읍으로 나오라는 동지들의 연락이었지요. 나도 모르게 상기되어 두 손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며 읍으로 내달았습니다. (중략) 한창 젊을 때라 일본인 도의원이었던 악질 대금업자를 꿇어 앉혀 놓고 사죄를 받기도 하고, 악질 면 직원을 몽둥이로 혼내 주기도 하면서 한참을 돌아다녔지요. 동지들과 함께 옛 청년회관을 도로 찾아서 군 인민위원회 간판을 걸고 공백상태인 정권과 치안을 수습해 나갔습니다. 일본인 가옥과 재산을 접수하고 행정기관과 공공시설은 물론 물자 관리도 우리가 맡았지요.(이종 회고록)
 
해방 직후부터 영동군의 지식인과 농민운동 출신 활동가 들은 옛 청년회관에 군인민위원회 간판을 내걸고 행정과 치안을 관리했다. 조선공산당 영동군당이 각 읍·면까지 조직되고 민청이 만들어졌다. 특히 농민회는 충북 지역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다. 이때 활동한 이들은 양강면 양정리 출신의 장준·장철, 영동읍의 김극수·두수·태수 형제(매천리), 이종(봉현리), 오중순(심원리), 심천면 금정리 출신의 민민호·민공호 형제와 민원식, 그리고 황간면의 트로이카 손순흥, 최판흥, 추교경 등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으로 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장준을 위시한 활동가들은 영동농민조합을 결성해 농민 권익향상에 앞장섰다. 그 영향으로 한때 영동군 농민회원들은 3000명이나 됐다. 또 1920~30년대 영동군에서는 야학운동과 소비조합운동이 대중적으로 벌어졌다. 이런 일들은 마을 단위 농민들에게까지 확산됐으며, 그 결과 농민운동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일제는 농민회 간부들을 영동청년동맹, 영동적우동맹 사건으로 엮어 구속시켰다. 이러한 탄압에 영동군 사회운동은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 소강기를 거친다. 하지만 영동군은 1930년대 중반까지 일제에 저항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벌인 충북의 유일한 지역이다. 이러한 에너지가 해방을 맞아 다시 한번 분출됐다. '민주주의 민족전선', '영동군 농민회'로 에너지가 모인 것이다.

1946년 10월항쟁을 기점으로 영동경찰서는 좌익 탄압을 전면화했다. 좌익이 사용하던 읍내의 민전회관은 폐쇄됐고 좌익의 근거지는 양강면 양정리로 옮겨졌다. 양정리는 영동군의 최고 좌익 지도자 장준의 마을이었다. 이때부터 좌·우익 간의 투쟁이 심화되었고,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투쟁, 1948년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도살명부'가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좌익을 불법화하자 좌익세력의 저항은 무장을 동반한 폭력화 경향을 띠었다. 특히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앞두고 남로당 영동군당은 우익인사 테러를 강화했는데, 이때 작성된 것이 '도살명부'다. 도살명부에 오른 이들은 대동청년단을 위시로 한 우익단체 간부, 지주, 사업가 등이다. 명부에 오른 이가 실제 사망한 경우는 없지만, 단독선거 반대 투쟁 과정에서 양강면 부면장이 살해되기도 했다.
 
이민준(가명)은 1948년 5월 5일 오후 5시경 속칭 양강면 양정리 뒷산 가장골에서 남로당 양강면책 박◌환에게, 5·10선거 적극 지지자 및 우익 악질분자 암살계획을 설명하고 해당자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양강면책 박◌환으로부터 해당자를 보고받은 이민준은 양강면 부면장 배원규, 대동청년단장 전광거, 향보단장 김재형, 선거위원장 민진호를 살해할 것을 지시하고, 괴목리 구장 박래익을 구타 중상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이들 중 사망자는 양강면 부면장 배원규 1명이다) (공주대학교 보고서)
 
다만 좌익들만 도살명부를 만든 건 아니었다. 영동경찰서의 '사찰조사철' 등을 보면 영동경찰과 우익도 여러 유형의 살생부를 만들었고 남로당 활동가나 빨치산 관련자를 학살했다. 경찰은 일제시기부터 내려오는 '요주의 요시찰인 명부'를 비롯 남로당원이나 빨치산대원, 혹은 그 가족이나 동조자의 정보를 담은 다양한 형태의 명부를 가지고 있었다. 
 

좌익에 의해 학살된 양강면 부면장 배원규의 집터 ⓒ 박만순

 
수첩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영동경찰서는 좌익세력 탄압을 본격화했다. 당시 영동군 산악지대에서는 빨치산 활동이 폭넓게 이루어졌고 인근 주민들도 빨치산에 우호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빨치산 동조세력이라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되었다.

영동읍 설계리 서상관(32세), 최갑출(24세)은 토벌 과정에서 발견된 빨치산 수첩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로, 1949년 3월경 영동경찰서에 연행돼 고문으로 사망했다. 서상관의 시신은 영동읍 설계리 구수동 길가에 버려졌다.

충북 영동군에서의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발발했다. 사상과 이념이 다른 세력을 인정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낳은 국가폭력이 이미 전쟁 수준이었다.  
a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서상관의 시신이 버려진 영동군 영동읍 설계리 구수동 ⓒ 박만순

   
#테러 #적우동맹 #도살명부 #장준 #단독정부수립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