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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앞세워 관군ㆍ일본군과 접전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35] 최시형이 북접의 동학교인들에게 총진군 명령을 내리자

등록 2021.07.26 18:05수정 2021.07.2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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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박용규

 
최시형이 북접의 동학교인들에게 총진군 명령을 내리자 때를 기다리던 동학도와 농민들이 도처에서 속속 모여들었다. 최시형의 명령과 함께 손병희ㆍ손천민ㆍ이종훈 등의 지휘 아래 북접 동학농민군은 관아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는 등 경기도 일원을 위협하였다.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한 달여 동안 북접 산하의 동학농민군은 경기도 지방 대부분을 석권하고 충청도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여기서 보은 수비대를 격파하고 부대를 둘로 나누어 1대는 영동ㆍ옥천으로부터 논산으로 직행하여 전봉준의 농민군과 만나고, 다른 1대는 회덕에 이르러 관군과 싸워 이들을 물리치고 논산에 도착하여 전봉준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논산에 동학농민군의 대본영이 설치되고, 이곳에서 전봉준과 손병희가 만났다. 이제 논산의 대본영에서는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손병희가 서로 만나 형제의 의와 생사를 맹세하니, 전봉준은 형이 되고 손병희는 아우가 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손병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한갓 일이 중하고 급한 것만을 생각하고 급거히 일을 일으켜 수없는 민재(民財)와 생명을 없애고 형세 이에 이르렀으니 내 한 몸만은 이제라도 선후책을 강구하여 최후의 한 마음으로 공주를 직충하면 십분의 희망이 있으니 돌아보건대 호남인은 여러번 싸운 나머지 피곤하기가 저러하니 원컨대 기호의 도중(道衆)이 동심협력하여 대사를 형성하기 바란다. (주석 5)

손병희는 남접군의 대표이고 명실상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과 손을 잡았다. 양측의 협력으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사명감에서 뜻을 함께 모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의(義)를 이루자는 '의형제'였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손병희 양대장이 서로 만나 손을 잡으니 일면에 옛같이 간담이 상조하고 지기(志氣)가 부합되는 지라. 드디어 형제의 의를 맺어 생사고락을 함께 맹세하니 전봉준은 형이고 손병희는 아우가 되었다. 이날로부터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장막에서 잠을 자고 기타 모든 일에 동일한 보조를 취해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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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남접의 동학군은 북접의 참여로서 그야말로 100만 원군을 얻은 셈이 되었다. 당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측의 동학군은 관군은 물론 당시 아시아 최강을 뽐내는 일본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은 비록 3개 연대의 8,000여 병력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잘 훈련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 조선정부군과 지방의 영병 또는 일본 대륙낭인들의 정보 지원을 받으면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상하였다.


동학혁명군이 소량의 화승총과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한데 비해 일본군은 영국에서 개발되어 수입한 스나이더(snider)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하여 임진왜란 때의 무기와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후발식 단발 소총으로서 1874년 일본의 대만 침략 때에도 사용되었던 신형무기였다. 동학혁명 당시 양측의 화력은 250대 1의 수준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10월 9일(음력) 삼례집회 이후 10월 12일(음력)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이 본격화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15일(음력) 충청북도 청풍 부근에서 충주지방 경비병이 동학군 수령급 이하 30여 명을 살육하고 화승총 2000정과 화약 등을 약탈하였다. 10월 25일(음력)에는 대구 병참부의 일본군이 성주에서 동학군 11명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앞서 11월 12일 보병 제19대대가 서울에서 출발해서 동학군 학살전에 가담하였다.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3개 중대는 전병력을 3분하여 공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키 대위가 이끈 제1중대는 동로(東路)로 장호원을 경유하고, 모리오 대위의 제2중대는 서로(西路)로 진위를 경유하고, 이스쿠로 미츠마사 대위의 제3중대는 중로(中路)로 양지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

동학군 학살부대는 일본군 3개 중대가 주력을 이루고 기타 조선관군과 일본군이 양성한 조선 측 교도 중대, 그 밖의 일본군 수개중대와 대륙낭인들이 참가하였다. 동학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의 접전을 벌인 것은 우금치 전투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이 활동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동학도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점차 패퇴의 길로 빠져들었다. 북접 역시 남접과 같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세한 이래 남접 동학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공주 공방전에서 패전 후에도 전봉준의 부대와 고락을 같이 하며 후퇴하다가 순창에서 비로소 공동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를 향하여 북상하게 되었다.

이후 진안ㆍ장수ㆍ무주 등지를 우회하여 충청도의 영동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이 심하여 이곳에서도 지탱하지 못하고 청주 화양동을 거쳐 충주에 이르자 또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아 12월 24일을 기하여 잔여 부대를 해산하고 교조 해월 이하 손병희ㆍ손천민ㆍ김연국 등의 동학지도부는 각기 개별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7)

손병희가 지휘하는 동학군은 여러 차례 전봉준이 이끈 부대와 합동으로 전투하여 패하기도 하고 승리도 거두었다. 11월 25일 원평전투에서 패하고 태인으로 퇴각하여 머물다가 추격하는 관군에 패하였다. 동학군 2만 군사가 500명으로 줄어들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은 우금치전투와 관련 손병희가 이끌었던 동학군의 동향에 대해, 입도할 때부터의 동반이었던 이종훈의 기록이다.

의암 선생의 말씀을 받들어 논산으로 이동하여 전봉준과 합진한 지 3일만에 의암 선생께서는 신사(최시형)를 모시고 와서 진중에 유중하였다. 관군과 3차례 공주전투에 크고 작은 건투를 하였으나 패하고 관군의 추격으로 인하여 전라도 장성까지 14번의 교전을 하였다.

이후 손병희가 지휘하는 동학군은 무주 무풍과 영동 용산에서 추격하는 관군을 격퇴시키고 보은 종곡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종곡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아 다시 퇴각하여 충주 외서촌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다시 관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전의를 상실한 동학군은 더 이상 싸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손병희는 외서촌전투를 끝으로 그동안 생사를 같이 하였던 혁명의 동지들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손천민ㆍ손병흠ㆍ김연국ㆍ홍병기ㆍ임학선 등과 더불어 스승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 땅을 찾아 떠나갔다. (주석 8)


주석
5> 김삼웅, 『녹두장군 전봉준 평전』, 190~191쪽, 시대의 창, 2007.
6> 오지영, 앞의 책, 165쪽.
7> 『천도교창건사』 제2편, 66~67쪽.  
8> 성주현, 『손병희』, 104쪽, 역사공간, 2012.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월 #최시형평전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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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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