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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성공, 그 대원 덕분에 가능했죠"

수봉공원에 새겨진 2만2천명의 이름... "6.25 참전 유공자 공로 잊지 말길"

등록 2021.07.24 11:33수정 2021.07.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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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인천시민 2만2000여 명의 이름이 담긴 명비가 세워져 있다. 고융희(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 사진 왼쪽) 지부장과 김평곤 사무처장이 이곳을 둘러보고 있다. ⓒ 김지숙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이자 '6.25전쟁 정전 협정일'이다. 우리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친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한 날이자 전쟁을 일시적으로 종전시킨 날이다.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내외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인천 수봉공원을 찾았다.

수봉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인천시민 2만2000여 명의 이름이 담긴 명비가 세워져 있다. 고융희(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 지부장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고융희 지부장에게서 한국전쟁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았다.

켈로부대 출신 고융희 지부장 "인천상륙작전 성공 못했다면..."
 

고융희(87) 지부장은 17세 때 미8군 켈로(KLO)부대에 입대했다. 켈로부대는 미군과 한국군으로 구성된 첩보부대다. 고향이 강화인 그는 부대에 먼저 들어간 친구의 권유로 자원했다.

"자원입대지만 너무 힘들고 위험해서 나중에 후회했죠. 훈련도 훈련이지만 배고픔은 견딜수 없더라고요. 먹을 게 없어서 밭에 몰래 들어가 인삼이나 고구마 를 캐 먹기도 했어요."

켈로부대원으로서 그의 일은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수집하는 것이었다. 수집한 정보는 북진에 이용됐다. "통신시설이나 인원, 동태 등 모든 정황을 하나하나 다 파악해야 했어요. 모르면 우리군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고융희(87) 6.25 참전 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지부장은 17세 때 미8군 켈로(KLO)부대에 입대했다. 켈로부대는 미군과 한국군으로 구성된 첩보부대다. 고향이 강화인 그는 부대에 먼저 들어간 친구의 권유로 자원했다. ⓒ 김지숙

 
켈로부대는 6.25 전쟁때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시 전세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상황이었다. 북한군 배후를 급습하기 위해 켈로부대 대원들이 팔미도에 불을 켜면 미군함이 월미도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러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미함정이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팔미도 등대 점등장치가 고장 나 불을 밝힐 수 없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대원 중 한 명이 손을 써 겨우 불을 밝혔어요. 조금 늦었지만 작전을 성공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죠."

고 지부장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아마 서해 연평도와 백령도까지 다 이북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수봉공원 전적비 주탑에 팔미도 작전을 상징하는 횃불 든 군인 형상이 조형물로도 표현돼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휴전됐다. 하지만 그는 휴전 이후인 1954년 2월까지 부대에 남아 있었다. 부대가 여전히 해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소리는 없었지만 약 2년 동안은 어수선한 상황이 지속되며 소리 없는 전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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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공원 조성되어 있는 UN참전 기념탑 ⓒ 김지숙

 
"참전용사 대한 예우 필요... 후손들 애국심 지켜나가길"

미8군 소속 부대가 전부 해산된 이후 고 지부장만 현역으로 군입대를 다시 했고 1960년 즈음 완전히 제대했다. 약 10여 년 가까이 군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쟁때 다수의 군인들이 사망해 군대 갈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길고도 모진 군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는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참 좋았다"며 힘들었던 전쟁과 군생활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전쟁은 그에게서 동료를 빼앗았고 깊은 슬픔도 남겼다.

"부대원 중 18명이 전사하고 10여 명만 살아남았는데 제 친구도 그때 목숨을 잃었고요. 눈만 끔뻑끔뻑하다 숨지는 모습을 보는데 그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피난 나와 3일 후에 돌아가겠노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70년 넘는 세월 동안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인천에도 피난 나왔다 못 돌아간 이북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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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잘 모르고 하지만 예부터 지배당해온 역사도 있고 지금도 완전히 전쟁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라며 "요즘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를 바로 알고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기억해 더욱 발전하는 나라로 만들어 주면 고맙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인천광역시 6.25 유공자 참전비와 명비를 찾은 고융희? 지부장과 김평곤 사무처장(왼쪽). ⓒ 김지숙

  

수봉공원에 위치한 6.25 참전 인천지구 전적비에는 일반시민들의 발걸음이 잦다. 전적비 찾아 순국열사에 대해 경례를 하고 있는 일반시민. ⓒ 김지숙


수봉공원 전적비 공간은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모두 명비에 새겨진 이들의 가족이나 후손들이다. 취재 당일 불볕더위였음에도 가족으로 보이는 한 유족이 묵념을 하고 있었다. 전적비 둘레를 에워싼 명비에는 6.25 전쟁에 참여했던 인천시민 약 2만 2천여 명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모두 국가보훈처 기록정보를 통해 수집된 유공자로 전쟁에 참여했던 인천 거주자와 인천에 거주하다 돌아가신 사람들이다.

전적비는 1980년대 초 국토교통부가 세웠다. 수봉공원에 세워진 이유는 당시 그곳이 지대가 높아 인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다.

6.25 참전 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 김평곤 사무처장은 "당시에는 수봉공원이 그리 울창하지 않아 어디에서나 인천 시내가 잘 보였다"며 "사람들이 한눈에 보면서 참전용사들을 기억하기 위한 적당한 장소였다"고 설명했다.
 

수봉공원에 위치한 6.25 참전 인천지구 전적비 ⓒ 김지숙


그러나 전적비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부식되고 관리가 되지 않았다. 기억하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다 2014년 주변 정리를 거쳐 2017년에는 6.25 참전 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가 나서 국토교통부와 국가보훈처의 승인을 받아 명비를 세웠다. 올해는 주탑을 리모델링했다.

김 사무처장은 "유명무실한 탑이 되지 않도록 후손들이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의 공로를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특히 유공자 중에는 어려운 분들도 많아 그분들께 더 많은 기회와 지원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며 "나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정신과 고마움을 지금 사람들이 몰라주면 너무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김지숙 i-View 객원기자 jisukk@hanmail.net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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