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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로부터 독립한다'면서 고종이 지은 건물

대한제국으로 출발을 상징하는 환구단과 황궁우

등록 2021.08.08 13:44수정 2021.08.0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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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나라는 길 잃은 어린 새와 같았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고 격랑에 휘말린다. 일본을 포함한 열강들의 패권 쟁탈의 장으로 변모, 이듬해엔 을미사변을 겪어내야 했다. 이는 조선 침략 과정에 기회상실 위기를 느낀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려 저지른 패악이자 극단적 선택이었다. 19세기 말 'The Great Game'이란 이름으로 횡행하던 식민지 쟁탈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삼문과 황궁우 아치형 삼문 중 가운데 아치 문 사이로 보이는 황궁우. 대한제국 선포 2년 후인 1899년에 지어진 건물로 땅의 기운(地氣)을 상징한다. ⓒ 이영천

 
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에 실질적으로 감금당한다. 실패로 끝난 춘생문 사건에 연이은 경복궁 탈출이 곧 아관파천이다. 그마저 을미의병으로 도성 방어가 취약해지고, 러시아가 자국 공관보호 명분으로 군사 백여 명을 한양에 불러들인 이후다.

아관파천은 일본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일본은 절치부심, 러시아를 가상의 적으로 삼아 군비확장 10개년 계획에 착수한다. 이를 기화로 러시아를 주적으로 삼는다. 러일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경운궁 수리

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경운궁을 수리한다. 경운궁을 정궁(正宮)삼아 정치 중심 공간으로 활용할 의도다. 270여 년 버려진 궁궐을 정궁으로 삼기엔 상징성이나 규모, 건축 격식이 한참 뒤떨어진다. 당연히 수리가 필요하나,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경복궁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어 그곳으론 갈 수 없다. 정동(貞洞)은 외국 공관이 즐비하고, 이들 공관을 수비하는 외국 군대가 상주하는 곳이다. 따라서 일본의 간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나라 위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 언제까지 남의 나라 공관에 머물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1896년 9월 4일 경복궁에서 진전(眞殿)과 빈전(殯殿)을 옮겨오고, 28일 1차 수리가 완료된다. 10월 31일 고종은 경운궁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를 언급한다.
  

덕수궁 전경 고종이 아관파천 동안 수리하여 궁궐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1897년 2월 이곳으로 환궁하여 정궁으로 삼아 대한제국 시대를 열게 된다. ⓒ 문화재청

 
경운궁 수리는 같은 해 12월에 막바지에 이른다. 수리된 경운궁은 조촐하다. 즉조당과 석어당 등 몇몇 전각에 불과하던 경운궁에 침전인 함녕전과 준명당, 정문인 인화문이 함께 건설되어 궁궐의 기본 틀은 갖춘 꼴이다.

이제 이어(移御)할 명분이 필요하다. 국제 정세도 감안해야 하고, 아관에 머물며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요구에 너무 많은 이권을 내준 부담도 작용한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나라가 거덜날 지경이다. 하루라도 빨리 경운궁으로 환궁하는 게 최선이다.


독립신문과 경운궁 이어(移御)

서재필은 김홍집 내각에게 신문발간재정 4400원 지원을 약속받아 1895년 12월 귀국한다. 하지만 지원은 아관파천으로 집권한 친러내각에서 이뤄진다. 아울러 정동에 있는 정부소유 건물을 신문사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국문과 영문 총 4면으로 발행된 신문이다. 가로로 쓴 제호와 한글 띄어쓰기 등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하였다. 정부 재정지원으로 탄생한 신문이다. ⓒ 문화재청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탄생한다. 언로(言路)가 트인다. 서재필은 신문의 성공적인 창간을 발판으로 독립협회도 창립한다. 신문과 협회는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요구한다. 아울러 외국에 제공한 각종 이권 할양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다. 여론이 한 곳으로 모아진다.

내부적으로 환궁요구가 빗발친다 하더라도, 우유부단한 고종이 섣불리 환궁 결정을 내릴 위인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신변 안전이 담보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에 러시아가 화답한다.

1896년 6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즉위식에, 고종은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에게 간절한 구원의 글을 들려 보낸다. 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와 군사교관단 파견 등 5가지 사항을 요청한다.

5개 요구사항 중 비용이 적은 내용만 들어 준다. 그해 10월 24일 러시아 군사교관단 13명과 재정고문이 조선에 온다. 교관단은 조선병력 1600명을 선발, 2개 대대로 편제를 구성해 훈련을 시작한다. 이제 조선에도 왕을 보호해 줄 외국 교관과 군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어리숙하고 순진하다. 즉위식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비밀리에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맺는다. 북위 39°선으로 조선을 분할 점령하자는 논의를 하나 결렬되고 상호 군대주둔이 가능케 합의한다. 발톱을 숨긴 러시아를 너무 순진하게 신뢰한 것이다.

1897년 1월부터 신하들 환궁상소가 빗발친다. 그해 2월 18일 환궁방침을 결정하고, 20일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하여 아관파천 시대를 마감한다.

대한제국 시대로

환궁 뒤부터 친미·친러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생겨난다. 인민참정권과 왕정복고의 대립이다. 독립신문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친러 수구파를 맹렬히 공격한다. 친러 수구파는 이제 신문 탄압에 나선다.

러시아 압력도 가세해, 공사관 베베르가 고종을 움직인다. 드디어 고종이 서재필을 불신임하기에 이른다. 1897년 9월 새로 부임한 쉬페이에르는 베베르보다 더 공격적이다. 독립협회는 미국 당, 독립신문을 미국신문으로 규정한다. 신문 정간과 서재필 추방이 기획되기에 이른다.
  

환구단 추정 배치도 1897년 부터 1902년 까지 환구단 주변에 건축물 등 여러 시설이 들어선다. 그 전체 배치를 추정한 도면이다. ⓒ 이영천_현장자료 촬영

 
이런 와중에 조야(朝野)에서 진정한 독립의 의미로 칭제건원(稱帝建元)하라는 상소가 비등한다. 8월 14일 심순택이 상소를 올려 광무(光武)와 경덕(慶德)이라는 연호를 제시하자, 고종은 광무를 선택한다. 9월부터 유생들 상소가 빗발친다.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심순택과 조병세가 백관들을 이끌고 나선다. 그들은 3일 내내 궁궐 뒤뜰에서 하루에 네 시간씩 무릎 꿇고 간청하며 아홉 번 상소를 올린다. 고종은 여덟 번 물리친 뒤 아홉 번째 상소를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연호는 광무를 사용한다. 대한은 후삼국시대의 삼한을 아우르는, 광무는 외세 간섭에서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뜻을 담고 있다.

하늘엔 환구단(圜丘壇), 땅엔 황궁우(皇穹宇)
  

환구단과 황궁우(1907년 추정사진) 오른 쪽 둥근 환구단 모습이 뚜렸하다. 왼 쪽 황궁우로 드나드는 아치형 삼문과 그 뒤로 황궁우 모습이 나란하다. ⓒ 이영천_현장자료 촬영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둥근 제단이다. 이제 제국이 되었으니 천신께 제를 올려야 한다. 9월 25일 황제국의 격에 맞는 환구단 건립이 결정된다. 영선사 이근명이 지관을 데리고 터를 잡는다. 지관은 옛 남별궁(南別宮) 터가 천기(天氣)가 쏟아져 내려오는 곳이라 칭송한다.

이곳에 길지의 좌향(坐向)을 정해 제단을 쌓는다. 당시 최고 도편수 심의석 설계로 10월 2일 착공하여, 천여 명 인력을 동원 10일 만에 완공한다. 칭제건원이 번갯불에 콩을 볶는다.

둥근 원뿔모양 지붕 중앙 상부를 번쩍이는 금색으로 칠한다. 원(圓)은 황제의 상징으로 아무나 쓸 수 있는 도형이 아니다. 그래서 환구단을 원구단(圓丘壇)이라 부른다. 궁궐, 종묘, 사직단 외에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이유다.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을 짓는다.

대한제국 선포는 마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문패만 바꿔 단' 꼴이다. 10월 12일 새벽 두시, 환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오른다. 힘없는 나라의 지존 칭호가 왕이든 황제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황궁우 모습 화강암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통으로 된 3층 팔각 집을 지었다. 최근 주변을 단장하여 출입문 등을 새로 만들었으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호텔 부속건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지낸 세월이 무척 길다. ⓒ 이영천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더 큰 물결로 다가오는 이리떼를 어찌하지 못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칭제는 왕정국가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청나라로부터 독립일 뿐이다. 지존 자리를 지켜내는, 오로지 전제군주정을 온존시키는 안위일 뿐이다.

공화정커녕 의회가 있는 입헌군주제로 나아갈 생각조차 없다. 독립신문 및 협회와 부딪치는 지점이다. 황제에 오르고서 단행한 첫 일이 고작 죽은 왕비 장례식이다. 그것도 당시 재정 능력에 비춰,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황궁우 내부 통으로 된 3층 꼭대기 한가운데 황제를 상징하는 칠조룡을 조각하고, 주변을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3층 각 면마다 설치된 3개 씩의 창을 통해 들어 온 빛이 내부 장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 문화재청

 
1899년 환구단 북쪽에 황궁우를 건립한다. 지관들은 황궁우 터를 지기(地氣)가 솟구쳐 오르는 곳이라 칭송한다. 화강암 기단에 돌난간을 둘러 세운 3층 팔각집이다. 통층 건물에 3층엔 각 면마다 3개씩 창을 내고, 천장엔 칠조룡(七爪龍)을 조각한다. 팔각과 칠조룡도 황제의 상징이다.
  

아치형 삼문 황궁우로 드는 아치형 삼문이다. 사용 된 검은 벽돌과 지붕 모양이 전형적인 청나라 풍 건축의 흔적이다. ⓒ 이영천

 
건물 층 구성과 창문모양이 청나라 풍이다. 검은 벽돌로 지은 아치형 삼문의 지붕 모양과 벽돌쌓기도 전형적인 청나라 풍이다. 청나라로부터 독립한다면서, 청나라 풍 건물로 칭제의 상징을 삼은 것이다.
  

돌로 만든 3개의 북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1902년에 만들었다. 몸체에 화려한 용 문양을 새겼다. ⓒ 이영천

 
1902년 황궁우 앞에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돌로 만든 3개의 북(石鼓)을 세웠다.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며, 몸통엔 화려한 용문(龍文)을 조각하였다.

이 나라를 보면 아쉬움이 한 가득이다. 칭제건원이 유일한 길이었을까? 상징적인 왕권을 인정하는 대의기구를 갖춘 체제로 나갈 수는 없었을까? 진정한 국력은 한데 모아진 백성의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당시 위정자는 모르고 있었을까?

도심 빌딩 숲에 가려 자기 존재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황궁우가 그래서 더 처량해 보인다.
#을미사변_아관파천 #경운궁_환궁 #대한제국_광무 #환구단_황궁우 #독립신문_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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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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