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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초상 걱정에 심장이 갈기갈기, 광주다움을 보여주세요

[광주 건물붕괴 참사 유족이 쓴 편지 ①] 책임 소재 규명과 합당한 처벌이 간절합니다

등록 2021.08.06 13:21수정 2021.08.0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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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9일 발생한 '광주 학동 재개발 구역 건물 붕괴'는 참사이자 사회적 재난이었습니다. 앞서 경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지만 유족들은 지금도 ▲ 철저한 진상조사 ▲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통탄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유족들과 법률대리인단은 5일 오후 광주경찰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중 유족이 쓴 탄원서 일부를 동의를 구해 싣습니다. 이 글은 다섯 자매 중 막내였던 고 김아무개씨의 네 번째 언니가 쓴 것입니다. 김씨는 아버지와 함께 엄마의 병문안을 가다 참사를 당했고, 특히 홀로 살아남은 아버지는 최근에야 딸의 소식을 접해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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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된 버스 살피는 구조대원 9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의 한 철거 작업 중이던 건물이 붕괴, 도로 위로 건물 잔해가 쏟아져 시내버스 등이 매몰됐다. 사진은 사고 현장에서 119 구조대원들이 구조 작업을 펼치는 모습. ⓒ 연합뉴스

 
존경하는 광주경찰청장님!

저는 2021년 6월 9일 광주 학동에서 사고로 고인이 된 김OO의 네 번째 언니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제 동생을 포함해 불의의 사고로 영면에 든 아홉 분의 명복을 애가 타도록 빌고 또 빕니다. 제발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기를, 무섭지 않기를, 외롭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족들과 언젠가 만난 날을 기다리며 행복하게 지내주기만을 기원합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고 49재가 지났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은 그 이후의 삶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습니다. 6월 9일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중한 제 동생이 절대 바라지 않을 모습이겠지만, 부지불식간에 사랑해 마지않는 막내를 잃은 깊은 슬픔은 모든 가족을 삼켜 버렸습니다.

다섯 자매간의 우애와 가족의 화목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던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자매들 간의 끈끈한 사이는 저희 가족들의 커다란 자랑이었습니다. 언니들이 직장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도,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조카들이 하나, 둘 태어나도 가족의 강한 정서적 울타리 안에서 행복을 공유하며 소소한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막내 이모는 어디 있어?"

동생의 49재를 지낸 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어린 조카가 어머니께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7명이나 되는 조카들과 가장 신나고 재밌게 놀아주던 막내 이모만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물어본 것이겠지요. "막내 이모는 하늘나라에 있다"고 울먹이며 겨우겨우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저와 언니들에게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매순간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동생의 부재와 죽음으로 인해 끝을 모르는 고통을 느끼며 저희 가족은 매일을 2021년 6월 9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산업개발의 슬로건, 어디로 간 겁니까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극심한 정신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로 매우 고통스럽고 비통한 날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부모님을 위해 남은 딸들이 버텨야 하는 것과 같이 4명의 딸들을 위해 부모님 또한 정신적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집안의 재간둥이이자 사랑둥이였고, 사고 당일까지 부모님과 함께 일상을 나누었으며, 부모님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가장 첫 번째로 여겼던, 너무나도 소중한 막내의 허망한 죽음에 두 분의 정신력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애처롭기만 합니다.

속된 말로 줄초상이 나진 않을지, 또 다른 시련이 닥치진 않을지 딸들은 24시간 비상사태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신경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수면제나 신경안정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세상의 전부였던 막내딸을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부모님의 심정을, 같은 불행을 겪은 이가 아니라면 과연 그 누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경정신과 전문의와 상담을 할 때 본인의 몸 상태든 트라우마든 뭐든 전부 감당할 수 있지만 막내딸이 보고 싶을 때 너무나도 힘들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정말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든든하셨던 우리 아버지, 딸들을 위해 본인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어머니, 힘들 때 더 강해졌던 큰언니, 행동력 넘치는 해결사 둘째 언니, 냉철하고 이성적인 셋째 언니, 그리고 우리 가족 행복의 상징이면서 유머러스하고 쾌활하며 생각의 깊이가 남달랐단 우리 막내, 내 하나뿐인 동생.

저의 생일에 모든 가족이 불러주는 축하 노래를 들으면서 생일 초를 불어 끄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동영상에서 보았습니다. 5분 남짓한 동영상을 보면서 저는 소리 내어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동생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기 때문이며, 다시는 이렇게 웃을 수 없게 되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행복을 주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공간'이란 멋들어진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은 저희 가족을 비롯해 아홉 가족의 행복을 영원히 앗아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과 그리움은 짙어지고 고통은 곪아서 썩은 내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비명횡사한 가족에 대한 애절한 한이 평생 가슴 한 구석에 박제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브랜드의 주거시설을 짓는 현대산업개발은 과연 아홉 유가족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셨을까요?

'큰 아픔과 무거운 책임을 통감', '피해 회복, 조속한 사고 수습',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한 적극적 협조', '머리 숙여 사죄' 등 현대산업개발이 홈페이지에 내건 사죄문에 담긴 문구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한 적극적 협조' 부분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굴지의 로펌을 고용하며 불법 하도급과 불법 철거를 인지하지 못했고 사고를 예견할 수 없었다며 면피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경찰 수사 결과 또한 원청의 형사처벌 대신 단순 행정처분에 그친 바 있습니다. 이 결과를 두고 전형적인 솜방망이, 꼬리 자르기식의 결과라는 시민사회의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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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11일 오전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사고 현장에서 참배한 뒤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80년 5월을 떠올려봅니다

제 동생은 평생을 광주에 살았습니다. 저도 30여 년을 광주에서 살았습니다. 광주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상징성과 자부심을 되돌아볼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80년 5월 폭압적인 정치권력에 당당히 맞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도시입니다. 민주주의적 통로가 다원화된 현재에는 정치권력의 일방적인 압제가 불가능하지만 시장권력, 자본권력이란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광주 곳곳에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건설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대기업의 자본 논리와 돈만 밝히는 자들의 불법·부당한 행위들로 인해 전대미문의 참사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가 시민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그때와 같이 자본의 횡포와 불법적 이윤 추구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정의와 공정, 성숙하고 인간다운 인권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번 사고가 계기가 돼야 합니다. 이 사고에 중대재해처벌법을 소급해 적용할 순 없지만, 법 시행을 앞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대재해에 대한 피해의 심각성과 인명 사고에 대한 사업주·경영책임자 등의 책임에 대해 대한민국이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주가 가진 행정력을 최대한 동원해 이 사고의 책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 아홉 고인과 유족에 대한 위로이자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선도하는 길입니다.

이 탄원서가 제 동생을 살아 돌아오게 할 수 없습니다. 사고 이전에 가졌던 가족의 충만했던 행복을 다시 느끼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탄원서를 작성하는 까닭은 갑작스런 사고로 가족을 잃은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둡고 엄청난 것이며 이 고통의 당사자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명확한 책임을 묻지 않는 한 그 누구라도 고통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이 사건이 넘기는 힘들지만 걷다보면 넘어가는 고개였으면 좋겠다. 계속 빠져 들어가는 블랙홀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언니가 넋두리하듯 했던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현재 동생의 사고는 저희 가족에게 벗어날 수 없는 블랙홀입니다. 하지만 험난하고 넘기 힘든 고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남은 가족들의 따듯한 연대가 그 첫 번째이고 사건에 대한 책임 소재의 규명과 그에 대한 합당하고 엄정한 처벌이 그 두 번째일 것입니다.

저희 가족은 첫 번째에 집중하고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고 계시는 분들은 두 번째에 온 힘을 기울여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광주 #학동 #재개발 #붕괴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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