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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인데 재밌다... 궁금하면 펼쳐 봐

시가 있는 물리학 에세이 '우주를 만지다: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등록 2021.08.10 11:05수정 2021.08.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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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한 아이가 눈 오줌에 있는 물 분자가 한 달 뒤 내가 마시는 한 컵의 물속에 들어있다. 그 아이의 오줌에 들어있는 물 분자의 수는 대략 10의 23승일 것이고 이 많은 분자가 증발하면, 전지구의 대기에 섞일 것이다. 10의 23승 개가 대기에 섞이면 우리나라 상공에 있는 구름 속에는 적어도 수천억 개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구름에서 내린 빗방울 속에는 바로 그 오줌에 있던 물 분자가 적어도 몇 개씩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오늘 물을 마신다는 것은 그 오줌을 마신다는 말이 된다. - 권재술, <우주를 만지다: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중

'헉'했다. 내 몸 속에 피가 되고 살이 된 '토시'의 분비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토시'는 우리집 고양이다. 동거인이 전부터 키우던 토시는 어쩌다 나를 만나, 내 기준 없는 결벽증 때문에 구박데기가 되곤 했다. 특히 토시가 집 안에 흘리고 다니는 '분비물'을 보면 나는 바퀴벌레라도 본 듯 생난리를 피웠다. 아무래도 진정한 애묘인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인데, 더러운 곳과 깨끗한 곳을 나누어 집착하는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의 오줌 분자를 들이키고 중국 사막의 모래가 내 호흡기를 관통할진대, 하물며 한 집에 살고 있는 토시의 것이야. 나의 결벽은 팬데믹 시대에 유용한 습관이기는 하지만, 내가 자신이 설정한 영역에 무의미하게 붙들려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동거인에게 말했다.


"난 이제 포기했어. 토시는 내 안에 있어."

물리학과 문학적 감수성, 물과 기름이 아니다
 

'우주를 만지다: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물리학과 시와 에세이의 만남. 너무 섞은 거 아냐? 싶다면, 책을 덮을 때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들은 원래 나뉜 적이 없었다. ⓒ 특별한 서재

 
권재술 교수의 과학 에세이 <우주를 만지다: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책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이라면 풀어 써봤자 물리학이겠지, 했지만 이 책은 우리 삶에 닿아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콕콕 집어내어 '이런 게 있다니까?'라며 어제 겪은 이야기처럼 신나게 들려준다. 

책은 총 4장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1장 '별 하나 나 하나'에서는 거시세계를, 2장 '원자들의 춤'에서는 미시세계를 다루고, 3장 '신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양자역학에 대해, 4장 '시간여행'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 절이 끝날 때마다 내용에 대해 저자의 감성을 담은 '시'를 만날 수 있다. 추상적이고 어려운 시가 아니라, 편안히 건네는 농담 같기도 하고 일상의 애환을 담은 그림 같기도 하다.

읽으며 노학자의 원숙한 비유력에 감탄했다. 말도 못하게 크거나 말도 못하게 작은 물리학적 개념들을 피부에 와닿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양자얽힘, 불확정성의 원리, 상대론 등 어렵기로 악명 높은 개념도 나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끝없이 흥미를 자극하는 질문을 던지고 짧은 문장으로 발랄한 호흡을 살려가며 시원하고 재치 있게 전개한다.


이 책은 물리학과 문학, 우주와 감성이 절대 물과 기름 같은 사이가 아님을 알려준다. 우주와 관련된 개념들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며 울림을 준다. 과학이 문학보다 문학적이고 철학보다 철학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삶은 우주적인 물질과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를 잘 들여다보면 자신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낭만은 '우리는 모두 별에서 온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칼 세이건의 유명한 말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삶을 마감한 뒤에도 바람 되고 구름 되어 우리 곁에 있다는 말 역시 단순한 위로가 아닌 진실이다. 극단적인 문과 머리를 가진 내가 고교 때 물리를 이렇게 배웠더라면 '물포자'가 되었을 리 없다. 어쩌면 문학적 감수성과 우주에 대한 관심을 살려 지금쯤 잘 나가는 SF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이름과 경계가 만드는 편견, 내가 독립된 존재라는 착각

신기한 과학적 사실을 알아가는 맛도 쏠쏠하지만, 존재를 대하는 저자의 상냥함이 드러나는 부분들은 특히 마음에 와 닿는다.
 
경계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경계는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관념이다. 모든 갈등은 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다. (1부 '경계는 없다' 중)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참 아름다운 시로 보이지만 실은 엄청난 폭력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름이 있고 없고, 이름이 불리고 안 불리고가 왜 중요하단 말인가?
 (1부 '이름이라는 폭력' 중)
 
스스로 만든 이름과 경계에 갇히는 인간의 속성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현상에 생각이 미친다. 가깝게는 내가 문과생이라는 이름에 나를 가두고 상상의 영역마저 한정했던 것, 넓게 보면 'MZ세대', '페미니스트' 등 사회적 용어가 고정시켜버린 편견과 인상들.

이제는 전혀 새롭지 않은 세계 각지의 혐오범죄 뉴스를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연결감을 잃고 있는지 실감한다. 너는 나에게 해만 끼친다는 생각, 절대 너 같은 건 나와 같은 종류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전해져 몸이 굳는다.
 
내 몸에 들어갔던 공기가 1초 후에 너의 허파 속으로 들어가고, 1분 후에는 너의 핏속으로 들어가고, 1시간 후에는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피와 살이 너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모든 생명체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2부 '아보가드로수의 비밀' 중)

그러나 내가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는 생각 역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몫을 해내고 책임지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개념이지만, 우리는 몸부터 원자 간 이동으로 재구성되는 열린 존재들이다. 그리고 사실은 누구도 다른 사회구성원의 도움 없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적은 '내가 바로 우주의 일부'라는 말은 거창한 말이 아니었다. 나도 당신도 더 큰 것의 일부이다. 
 
벽이 없다면 방이라는 공간은 없다. 공간이란 물질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다. 만약 이 우주에 입자 하나만 있다고 해 보자. 그 입자의 위치가 어디인지 말할 수 있을까? 좀 더 나아가 입자 두 개만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두 입자 사이의 거리를 말할 수 있을까? 두 입자 사이의 거리는 그 두 입자 사이에 늘어선 `그 무엇'(다른 입자)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 두 입자 사이에 `그 무엇'이 없다면 어떻게 거리를 알 수 있겠는가? 공간이란 텅 빈 무엇이 아니라 입자들의 배치관계일 뿐이다. 입자가 없으면 공간도 없다. (4부 '시간과 공간의 탄생' 중)
 
세상에 오로지 홀로 있다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찾으려 애쓰는 '의미'라는 녀석들 자체가 대상과 그 대상의 변화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나의 좌표를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둘러싼 대상을 지켜보게 된다. 그러니 내가 대하는 모든 것들은 나와 이어져 있으며, 나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책이 내가 차곡차곡 쌓아온 오만을 돌아보게 하듯이 말이다.

말도 못하게 중요하면서 말도 못하게 사소한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갈 뿐이다. 그게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담겨 있는 마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베란다 타일 위에서 배를 시원하게 까뒤집은 토시를 보며 읊조린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우주를 만지다 -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권재술 (지은이),
특별한서재, 2020


#서평 #물리학 #우주 #과학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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