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 100년 대결전... 최종승자는? ④

인도는 중국으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을까

등록 2021.08.09 17:42수정 2021.08.09 17:46
0
원고료로 응원
 
a

1953. 인천, 포로 송환선을 타고 자유중국으로 떠나는 중국군 반공 포로들 ⓒ NARA


  
영국, 세포이 반란 이후 통치 편의를 위해 영어권 인도라는 국가를 만들어

인도 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에 속해 있지만 히말리야 산맥 등으로 분리된 아대륙(亜大陸, subcontinent)이다. 1526년부터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통일하여 무굴제국을 세웠으나 이미 16세기부터 유럽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17세기에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인도를 놓고 경쟁하였다. 무굴 제국은 17세기말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대두하자 쇠퇴하기 시작해 18세기 초에 분열되었다.

1600년에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다른 서방국가를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스스로 통치하였다. 세포이 항쟁 직후 1858년에 영국 정부가 직접 인도를 통치하였다.

인도 반도에서 힌두교 교도의 인구는 전체의 80%에 이르나 1500년 이상 분열되어 하나의 나라라고 볼 수 없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통치의 편리를 위해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가진 인도 반도의 식민지에 영어와 영국식 정치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오늘날 인도라는 테두리를 형성하였다.

미국, 이슬람과 중국 및 러시아 견제 위해 인도와 정치군사적 협력 강화

인도는 18세기 초 세계 제조업 수출의 27%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식민지 기간 동안 영국이 산업기반을 파괴하여 독립할 무렵 인도의 세계 제조업 수출 비중은 2%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영국은 식민지 기간 동안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 종교뿐만 아니라 인종, 지역들 간의 분리정책을 수행하였고, 카스트 제도를 강화하였다. 영국은 1919년 인도인들에게 의회를 구성할 제한적인 선거권을 부여할 때조차도 종교에 따라 투표권을 제한하는 분리 선거구제를 도입하였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서남아시아에서 비이슬람국가인 인도와의 정치군사적 협력을 강화해왔다. 2004년 양국은 원자력에너지, 우주개발, 기술이전, 미사일방어 등 4대 분야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이행방안(Next Steps in Strategic Partnership)'에 합의하였다.

미국은 이 합의를 통해 인도의 핵무기를 실질적으로 인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인도를 동맹으로 만들어 이슬람 국가와 중국 및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연장선에서 테러와의 전쟁이 일단락 된 이후 미국은 인도의 러시아제 무기 체제를 미국식 무기 체제로 전환시키는 재정지원을 해왔다.

장제스, 항일전쟁에 인도인 끌어들이기 위해 인도 독립을 지원

사실 중국과 인도는 1962년 국경분쟁 이전까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2차 대전이전부터 장제스는 중국에서 식민지를 확대하려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를 도우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은 중일전쟁 중에 인도인의 도움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인도의 독립에 우호적이었다.

2차 대전 중에 영국은 인도와 버마를 놓고 일본과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일본과 전쟁 중인 장제스의 인도 독립 지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당시 인도인들은 영국이 1차 대전 참전의 보상으로 약속한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 속을 수 없다"면서 전쟁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인도에 재정, 의료 등을 지원하고 네루와 간디를 중국에 초청하여 반제반일운동을 고조시켰다. 인도인들도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제품을 불매하고 중국을 위한 모금운동도 전개하였다.

1940년 네루가 영국에 의해 구금되자, 장제스는 영국에 네루의 석방을 탄원하였으며 1942년에는 장제스 부부가 직접 인도를 방문하였다. 장제스는 간디와 회담을 하였으며, 인도 독립을 찬성한다고 선언하였다. 나아가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써 전쟁이 끝난 후 인도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인도의 친공산당 노선, 영국의 이간질로 국경분쟁으로 치달아

장제스는 인도 국민회의를 인도를 대표하는 정부로 공식 승인하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본토를 통일하자,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던 네루는 장제스 정권과 단교하고 마오쩌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한편 영국은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1914년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여 영국령 인도와 중국의 국경선을 일방적으로 확정하였다. 영국은 인도의 독립 이후에 이 국경선을 국제적으로 승인하였다. 영국이 인도와 중국의 국쟁분쟁의 씨앗을 만들어 놓고 양국을 이간질한 셈이었다. 

중국은 1951년 티베트를 무력으로 병합하여 인도 쪽으로 군대를 전진 배치하였다. 인도 군이 히말라야 인근을 점령하면서 양국 군대는 대치하게 되었다. 1959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탈출하여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우자 두 국가의 국경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중국 견제위해 미영소가 인도를 군사적으로 지원

스탈린 사후 중소가 이념갈등을 하면서 소련은 1960년 군사고문단을 중국으로부터 철수하였다. 소련은 대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인도와 중국이 나란히 서방과 소련을 견제하는 비동맹회의를 주도하였는데, 중국이 비동맹회의에서 이탈하면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국은 반중국동맹에 대응하는 동맹을 만들고자 인도의 적대국인 파키스탄을 지원하였다. 1962년 봄 미국의 묵인, 영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인도 군이 맥마흔 라인에 집결하였다.

이에 중국이 10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2만여 명의 인도 군을 격퇴하였다. 미국이 인도양에 항모를 급파한 가운데 중국은 소련과 서방의 개입을 의식하여 기존보다 20㎞ 후방으로 군대를 퇴각시키고 먼저 협상을 제의하여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인도가 도발, 중국은 외세 개입 우려해 철수

중국은 2017년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부탄과 영유권 분쟁이 있는 국경에 군대를 보내 도로건설을 하였다. 부탄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인도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닭의 목'이라는 불리는 이 지역은 인도 본토와 연결되는 폭 20㎞의 좁은 회랑이다.

인도가 먼저 중국군 초소를 파괴하자, 양국은 첨단무기와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인도는 미국에서 훈련 받은 산악 부대를 대기해 놓았다. 8월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난투극이 있었지만 핵무장 국가인 양국 모두 전면전을 우려하여 전투까지는 가지 않았다.

특히 중국은 남중국해 등 기존의 영토분쟁과 미국의 개입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도로공사를 중단하고 병력을 후퇴시켰으며, 인도도 철군하였다. 중국은 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강대국의 개입을 염려하여 점령지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미국, 서방체제인 인도가 급성장하여 중국을 견제하도록 전략적으로 지원

오늘날 인도가 영어권이고 서구식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영국 연방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인도가 영국의 과거 식민지인 호주,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동맹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미국은 중국과 국경분쟁 중인 인도를 중국의 견제세력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미국은 인도와의 관계를 동맹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미국은 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사령부로 확대 재편했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고 인도·일본·호주가 참여하고 있는 비공식 안보회의체인 쿼드는 중국봉쇄의 선두에 서 있다. 미국은 이 쿼드의 하위동맹에 한국, 대만, 필리핀 등을 포함시킨다는 구상이다. 

인도는 과거 미국과 소련에 등거리외교를 하는 비동맹노선을 걸어왔다. 하지만 최근 인도는 미국으로부터 핵무장을 인정받고 미국, 러시아, 중국에 버금가는 강대국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인도는 2차례나 전쟁에 패한 중국에 대항하고자 동맹까지는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는 영토, 인구, 언어, 문화, 경제성장의 잠재력에 있어 향후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 2017년 인도의 인구증가율은 1.1%로 중국보다 0.5% 높다. 따라서 인도의 인구는 2025년을 전후로 하여 15억 명에 육박하여 중국의 인구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7년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7.6%인 반면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6.9%였다. 2017년 1인당 GDP는 중국이 만 달러에 육박하지만 인도는 2천 달러에 불과하다. 따라서 중국의 양적 경제성장은 한계에 도달하였지만 인도는 아직도 양적 성장의 가능성이 높다.

종교와 인종간 내분, 주변국과의 적대관계로 인도의 잠재력이 제한 받아

따라서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향후 더 빨라지는 반면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은 영어권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의 지원만 있으면 같은 영어권이기 때문에 빠르게 경제성장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다.

또한 인도는 이미 영어권 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경제성장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인도는 새로운 전문인력의 육성에 있어서도 다른 비영어권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영국이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무시하고 영어권으로 하나의 인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분리에서 보듯이 인도의 내분은 뿌리가 깊다. 현재도 인도는 이슬람계의 독립운동으로 몸살을 겪는 등 다양한 인종을 통합해 내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이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지원하면서 인도를 압박하고 있다. 따라서 인도는 양국과의 관계를 안정화시켜야 중국과의 전면적인 경쟁이 가능하다.

또한 전 근대적인 관습 역시 인도가 글로벌 강대국으로 성장하는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인도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카스트제도는 인도인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식민지 시절에 영국에 의해 오히려 강화되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뒤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쿼드 #중국 #인도 #국경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