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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키운 미국의 아이러니, 그땐 몰랐다

[하성태의 사이드뷰] 무자헤딘 원조가 낳은 전쟁의 광포

21.08.19 11:09최종업데이트21.08.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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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 조직원들이 15일(현지시간) 수도 카불에 위치한 대통령궁을 장악한 모습.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은 이날 대통령궁도 수중에 넣은 뒤 "전쟁은 끝났다"며 사실상 승리를 선언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앞서 이날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직후 국외로 도피했다. ⓒ 카불AP=연합뉴스

 
'탈레반이 정권을 잡으면 암흑의 시대가 재림한다.'

히잡에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쓴 여성들이 중화기를 들었다. 아프가니스탄 국기를 흔들며 이들이 시위에 나선 광경에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국가가 민족이, 또 종교가 무엇이길래. 그러나 당위라기 보단 생존의 문제일 터.

탈레반이 정권을 접수했고 수백만의 난민이 인근 이란으로, 파키스탄으로 탈출 중이다. 대통령마저 돈다발을 싸들고 탈출 길에 올랐다. 국민들을 버린 것이다. 반면 아프간 정부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은 탈레반과의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 와중에 가족과 아이들을 살리겠다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무장까지 불사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모습은 절실함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슬람 강경 수니파인 탈레반이 자행한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협하는 인권 유린 수준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히잡보다 더한 억압의 상징인 부르카 착용은 기본. 여성이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는커녕 남성과의 동행이 아니라면 길거리를 거니는 것도 조심스러웠다는 탈레반 시절, 이슬람식 전근대적인 문화인 명예살인이 횡행했다는 증언도 부지기수였다.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비롯해 내외신을 통해 아프간의 현실을 알리는 중인 여성들도 입을 모아 탈레반에 대한 불신을 토로하며 전 세계인의 도움을 호소 중이다. 이구동성 점령 직후 여성 유화책을 내건 탈레반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절박함의 호소였다.

할리우드 영화 <세인트 주디>(2018)는 그런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탈레반 집권 당시 처했던 반인권적인 상황을 비교적 충실히 묘사한다. 훗날 미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프로젝트'를 이끈 변호사 주디 우드. 그가 1990년대 미국 이민법을 재정의하는 과정을 2000년대 초로 배경을 옮겨 보여주는데, 이 실화 드라마 속 주요 의뢰인이 바로 생존을 위해 망명을 시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이다.

제1의 피해자
 

영화 <세인트 주디> 속 한 장면. ⓒ (주)미로스페이스 , (주)태왕엔터웍스

 
절박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추방당한다?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세인트 주디>는 이제 막 이민 변호사로 발을 내디딘 주디 우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젊은 여성 아세파 아슈아리의 망명을 돕는 과정을 주요하게 조명한다.

지금은 머나 먼 타국에서 추방을 당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그도 한때는 어엿한 교육자였다. 여성 인권이 억압받는 현실 앞에 굴하지 않고,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아세파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물론 탈레반이었다.

입을 꾹 닫았다 점차 마음을 연 아세파. 그가 들려주는 진실은 참혹했다.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걷다 불한당 같은 탈레반들에게 끌려간 아세파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간마저 당했다. 이후 투옥 끝에 극적으로 탈출, 가까스로 미국까지 당도하지만 당시 엄격한 이민법 탓에 곧 추방당할 신세에 처한 것이다.

변호인 주디 우드는 판사 앞에서 아세파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간다면 생명에 중대한 위험이 처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것도 여성이라서 받는 차별에 의해서가 아닌 '정치적 박해'로 인한 위협임을. (실화 속 1990년대) 당시 미 연방 이민법, '미국 제9순회 항소법원'의 원칙이 그랬다.

아세파가 여성들이 교육 받을 권리를 박탈한 탈레반에 맞서 저항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아세파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간다면 이슬람 국가 내 잔존하던 '명예살인(가족, 부족, 공동체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조직 내 구성원을 살해하는 행위)'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미국 이민법은 '여성 차별'을 쉬이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겪었던 모든 사실을 낱낱이 고한 후에야 '해피 엔딩'을 맡는 아세파. 그의 회상을 통해 이 영화가 가리키고자 한 것은 탈레반으로 상징되는 이슬람 강경파의 여성인권 탄압과 이를 애써 외면하려 했던 '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세인트 주디>가 '트럼프 시대'에 당도했던 것은 그래서 더 상징적이고 시의적절하다. 영화 속 백인 여성 변호사와 아프가니스탄 여성, 둘의 연대는 그 자체로 여성 혐오와 여성차별, 그리고 소수자 및 이민자 차별을 대놓고 정책화했던 트럼프 시대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저항하는 법정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실화와 달리 미 이민귀화국(INS)이 트럼프 시대에 맹위를 떨쳤던 이민세관단속국(ICE)으로 탈바꿈했던 2000년대 초중반으로 시대 배경을 바꾼 것도 그래서일 테고. 하지만 나쁜 역사는 반복됐다고 했던가.

영화 속 아세파는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현실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언제 과거로 회귀할지 모르는 탈레반에 맞서 중화기를 들게 됐다. 미국이 "국익 우선"을 외치며 철군한 탓이다. 그리고 미국 전엔 소련이 있었다. 이 역시 할리우드 영화들의 주요 소재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국
 

영화 <세인트 주디> 속 한 장면. ⓒ (주)미로스페이스 , (주)태왕엔터웍스

 
서구 열강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원조는 소련(구 러시아)이었다. <람보3>(1988)로 대변되는 중동 관련 전쟁 액션 영화들의 단골 소재가 바로 미군과 CIA가 이런 소련을 쳐부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9.11 테러 이전 '냉전시대' 미국은 소련에 대항해 아프가니스탄 반군(무자헤딘)을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톰 행크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찰리 윌슨의 전쟁>(2007)은 한 '보수꼴통' 공화당 의원이 제 정치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CIA를 동원, 재래식 무기를 아프간 반군에게 제공하는 과정을 그린 실화 소재 영화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규탄하는 반전 분위기를 반영하는 이 정치드라마이자 블랙 코미디는 소련이 물러난 이후 미국의 무자헤딘 원조는 어떻게 탈레반의 규모를 키웠고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의 광포로 몰아넣었는가 하는 문제제기에까지 다다른다.

'미드' 사상 최고의 첩보 스파이 드라마라 평가받는 <홈랜드>의 피날레인 시즌8(2020)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식과 탈레반과의 평화 협정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다운 상상력의 발현이었다.

탈레반 내 평화를 원치 않는 주전파와 아프간 외부 세력은 심지어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헬기로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미국의 새 대통령을 암살하는 만행을 자행한다. 첩보 드라마이니만큼 주인공인 전 CIA 요원 캐리가 진상을 밝히고 또 다른 전쟁을 막아내지만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전운은 종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미국 영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의 피해다. 이는 미국을 대표하는 우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처럼 노골적인 반이슬람 시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는 여성과 아동을 위시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일 터.

캐나다, 아일랜드, 룩셈부르크가 공동제작하고 안젤리나 졸리가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한 애니메이션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2017, 국내 넷플릭스 공개)은 탈레반이 자행하는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된 주인공 소녀와 그 가족들이 주인공이다. 이를 통해 <세인트 주디> 속 아세파가, 그리고 현실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실제로 어떤 억압과 차별을 겪어 내야 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최근 K-팝 팬이라는 아프가니스탄 17세 소녀가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여자라면 절대 밖에 나갈 수 없는 환경"이라며 탈레반 점령군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 바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탈레반 점령 이후 원피스를 입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총에 맞아 숨진 사진이 외신을 통해 공개돼 전 세계인에게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국익 우선'을 선언한 미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결정을 두고 평가가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애당초 탈레반을 키웠던 것도, 그 탈레반에게 수도 카불을 함락 당하는 굴욕을 맛본 것 역시 미국이요, 이를 통해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이들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과 아동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이란 사실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아프가니스탄 밖에서 만들어진, 심지어 미 자국 영화들까지 이를 고발해왔던 셈이고.
아프가니스탄 미국 세인트주디 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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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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