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9월, 조선 사절단이 워싱턴역에 첫 발을 내딛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조지 포크의 조선 사절단 조우

등록 2021.08.23 16:37수정 2021.08.2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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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내가 1883년 9월 15일 오전 워싱턴 역에서 조선사절단과 운명적으로 조우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소. 그로부터 꼭 10년 후에 나는 일본 땅에서 삶을 마쳤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나의 운명은 바로 그 가을날 아침에 결정되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오.


민영익 대신 일행이 대륙 횡단 열차로 워싱턴을 향해 밤낮없이 달리고 있을 때에 나는 언론 보도를 통해 그들의 동정을 가늠하고 있었다오. 사실 나는 그해 5월에 이미 인사 부서에 아시아 함대로 발령을 내달라고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지요.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 답답하던 참에 조선 사절단 방미 소식을 접했지요. 왠지 마음이 들뜨더군요.

담당 부서인 국무부에서는 위싱턴에서 조선 사절단을 영접하고 안내할 미국 측 요원을 선임하는 일로 고심했지요. 상호 의사 불통이 가장 큰 문제였고요. 국무부 측은 고민 끝에 우리 해군부를 통해 슈펠트 제독이 그 일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타진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슈펠트가 적격이었지요. 10여 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한미 조약을 성사시킨 주역이 그였으니까요. 아마 조선 사절단을 가장 반가워한 사람도 그였을 겁니다.

당시 슈펠트 제독은 해군 자문위원회(Naval Advisory Board)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지요. 요청을 받은 슈펠트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슈펠트의 실무 보좌관으로 해군 장교 2명을 파견한다는 것과 영접과 접대에 소요되는 일체 경비를 국무부에서 부담한다는 것까지 합의되었지요. 헌데, 갑자기 슈펠트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자기는 지금 맡고 있는 업무가 많아 아무래도 뻬곡한 사절단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겠다면서 나 조지 포크를 천거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연락을 받은 나는 뛸 듯이 기뻤지요.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9월 15일 동이 트기가 바쁘게 제복을 차려입고 역(Balitimore and Potomac Station)으로 나갔지요. 기차 도착 예정 시간은 9시 반이었지만 한 시간이나 연착했습니다. 역에는 데이비스(Davis) 국무부 차관보, 메이슨(Mason) 해군 중위, 그리고 나 조지 포크가 나갔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1882년 한미 수교 후 한 달이 못 되어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던 미국인입니다. 그때 보았던 조선인들에 대한 인상이 선명하기만 한데 이제 그들을 미국 땅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역에서 데이비스 국무 차관보가 내게 물었습니다. "곧 조선인들이 도착할 텐데 그들과 의사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고심 끝에 데이비스의 말을 내가 일어로 통역하기로 했습니다. 조선 사절단에는 일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지요. 나는 일어에 능통했고 아주 초보적인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었지요.

이윽고 아라비안나이트에서나 나올 법한 복장을 한 이방인들이 미국 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가을 햇살 속에 플랫폼에 내렸습니다. 우리는 다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영접하였습니다.

데이비스 차관보는 짤막한 인사말에 이어 사절단에게 메이슨 중위와 나를 소개하였지요. 조선인들은 일어로 통역하는 나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더군요. 누군가가 민영익에게 나의 일본어를 한국어로 통역하였습니다. 

데이비스가 조선인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내가 찡긋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을 하자 그들은 놀란 눈을 크게 떴습니다. 우리 측의 인사가 끝나자 민영익 대신이 한두 마디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민영익의 말을 로웰(사절단에 속한 미국인으로 일어 소통)이 영어로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의사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군요. 하여튼 당시 의사소통 문제는 고난도 언어 게임이었지요.

참고로 조선 사절단의 언어능력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표를 본 다음 해설해 보겠습니다.
 

보빙사 언어능력 보빙사 인물별 언어 능력 ⓒ 출처: www.princeton.edu/~co

 
위 표에서 겹동그라미는 능통, 작은 동그라미는 어느 정도 소통, 세모는 일상어 약간 소통을 뜻합니다. 맨 마지막 항목 "Classical Chinese"는 한문을 뜻합니다. 위에서부터 한 명씩 외국어 이력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영익(1860-1914): 1882년 10월 일본을 방문했고, 이듬해 1월부터 4월까지 중국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1883년 9월 28일자 뉴욕 헤럴드지는 민영익이 일본어를 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일상 회화를 대충 이해하는 정도였습니다. 한편 중국에 3개월간 체류한 바 있어 중국어 일상어를 다소 아는 정도였습니다.

홍영식(1855-1884): 1881년 5월 일본을 방문하여 3개월간 일본의 군사 시스템을 살폈습니다. 기초 일본어를 습득했습니다.

서광범(1859-1897): 1881년 12월 김옥균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정세를 시찰하면서 5개월 동안 체류하였습니다. 다음해 9월에는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방일하여 1883년 3월까지 6개월간 머물렀습니다. 그는 나 조지 포크와 일본어로 소통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Percival Lowell(위의 표에서 Rowell은 오기임, 1855-1916): 1883년부터 10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 문화에 탐닉하고 <Soul of Far East 극동의 영혼> 및 <Occult Japan 일본 숭배>라는 책을 저술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사절단과 동행하여 미국을 방문할 당시엔 일본 생활이 일천하여 일본어가 매우 짧았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능통한 일본 청년을 비서로 데리고 갔지요.

유길준(1856-1914): 1881년 조선 정부가 일본에 시찰단을 보낼 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였습니다. 사절단 귀국 후에도 유길준은 일본에 남아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세운 학교(경응의숙慶應義塾: 오늘날의 게이오 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한 뒤 1883년 1월에 귀국하였습니다. 당연히 일본어에 능통하였습니다.

변수(1861-1891): 1882년 3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을 방문하여 5개월 동안 체류했으며 그해 8월 박영효의 방일시 수행하였고 7개월 정도 더 머물렀습니다. 방미시엔 일본어에 능통하였습니다.

고영철(1853-): 1876년 중국어 역관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881년 9월 정부 파견 중국 유학생으로 청나라에 가서 천진의 어문국語文局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얼마간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절단 중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영어를 다소나마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측과의 통역에는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최경석(?-1886): 무관으로 수행했으며 외국어 실력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오례당(吳禮堂우리탕): 중국인으로서 묄렌도르프(독일인으로 조선의 대외업무 관장)의 초빙으로 조선의 세관에서 일했습니다. 영어(미국 유학)와 스페인어(부인이 스페인 사람)에 능통했습니다.  

미야오카 츠네지로: 당시 17세로 로웰의 개인비서로서 미국에서 유학하여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수인사가 서로 끝나자 사절단 일행은 마차에 올라 유명한 알링턴 호텔Arlington Hotel로 향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 #보빙사 #민영익 #로웰 #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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