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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민당 위원장에 피선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41] 1949년 11월 14일 지청천ㆍ배은희 등과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게된 배경

등록 2021.09.17 17:13수정 2021.09.1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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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실 개관식 국회도서실 개관식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는 관계자들. 1952년 2월 20일 개관식 때 촬영한 사진이다. 국회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닌 ‘도서실’로 출발했다. 사진 오른쪽부터 존 무쵸 주한 미국대사, 윤택중 의원, 신익희 국회의장, 박종만 국회사무총장이다. ⓒ 국가기록원

 
신익희는 정부출범 초기부터 이승만의 오만과 독선ㆍ독주 특히 인사의 전횡과 반민특위에 대한 행위를 지켜보면서, 이를 견제하고 민주공화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949년 11월 14일 지청천ㆍ배은희 등과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게된 배경이다. 

해가 바뀐 1950년 2월 23일 대한국민당은 김성수가 주도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합당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 신익희ㆍ지청천ㆍ백남훈ㆍ김성수 4인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신익희가 위원장을 맡았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첫 조각에서 한민당은 국무총리와 내각의 과반수를 요구하였으나, 이승만은 한민당 소속인 김도연만을 재무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한민당은 우선 원내에서 당 소장파와의 대립으로 그 인기가 저하되어 감에 따라 이를 회복하기 위해 과거 한독당 소속이었던 대한국민회의 신익희 세력과 대동 청년단의 지청천 세력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해체하고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한민당의 후신이 된 민국당은 원내에 70석을 가진 우리 나라 정당사상 최초의 야당이 되었다. (주석 5)

해방 후 한국정당사에 큰 획을 긋는, 정통민주정당의 주춧돌을 놓는 사람이 신익희였다. 민국당은 친일세력인 한민당과의 통합으로 '정통민주정당'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는 5년 뒤(1955년) 민국당과 호헌동지회를 발판으로 정통민주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민국당은 일종의 과도기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본다.

제헌국회에 상당수 의원을 당선시킨 한민당은 애초에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마련했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제 헌법으로 바뀌고, 조각에서도 배제됨으로써 이승만과 갈등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민당은 친일협력의 전과를 덮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분산과 참여를 전제로 하는 내각제를 추진하다가 좌절되고 입각도 거부당하게 되면서 '이승만 비판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신익희는 1949년 2월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세력과 한민당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이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일각에서 한민당을 '한국야당의 모태'라고 부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한민당은 여당이라고도 야당이라고도 규정하기 어려운 '양성(兩性) 정당'의 성격이 강했다.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에 선출한 여당이면서, 집권 후 초대내각의 구성에서 소외되면서 야당이 되었다. 그리고 구성분자들도 한민족의 정통세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민주국민당(민국당)은 한국민주당에서 '민주'라는 글자를, 대한국민당에서 '국민'이라는 글자를 따서 1949년 2월 10일 창당한 최초의 야당이 되었다. 

민국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다. 내각제 개헌안은 1950년 3월 14일 무소속 일부와 협력하여 국회에서 표결에 붙였으나 부결되고 말았다. 

민국당은 창당 과정에서 신익희ㆍ김성수ㆍ백남훈ㆍ지대순을 4인 최고위원으로 선출하여 합의제로 운영하다가 얼마 후 능률적인 당운영의 명분으로 위원장제도로 바꾸었다. 위원장에는 신익희, 부위원장에 김도연ㆍ이영준이 선출되고, 고문에 백남훈ㆍ서상일ㆍ조병옥이 각각 위촉되었다. 신익희는 한국야당사상 최초로 전당대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국 야당사의 첫 당대표가 된 것이다. 

민국당은 이승만정부에 대한 반감이 대단하여 강령에서 "특수계급의 독재를 부인하고 만민평등의 민주정치 실현을 기함"이나 "경제적 기회균등을 원칙으로 자주경제의 수립을 기함"이라는 내용을 담아 이승만정부의 보수노선에 대립각을 세웠다. 

민국당이 당세를 확장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등 정부를 압박하자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정당사상 최초의 여당인 자유당을 결성하여 민국당과 맞섰다. 이로써 한국정당사상 최초로 여야 양대 정당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70석을 획득했으나, 3대 국회에서는 정부여당의 극심한 관권ㆍ부정선거로 15명의 당선자밖에 내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주석
5> 한정일, 「야당으로의 정비, 민국당」, 『한국의 정당』, 203쪽, 한국일보사, 1987.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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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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