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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피난수도에서 의장 재선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44] 국정은 크게 혼미상태에 빠져있었다

등록 2021.09.20 16:19수정 2021.09.2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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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대 국회의장단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 위키피디아

 
국정은 크게 혼미상태에 빠져있었다. 육군 300여 명이 1949년 5월 4일 38선을 넘어 월북하고, 미국무성이 주한미군을 6월 말까지 철수한다고 발표하였다. 1950년 1월 28일 한민당의원 28명이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이승만계열 의원들과 야당 의원들의 난투극 속에서 이를 부결시켰다(3월 13일). 이런 와중에 미하원은 대한원조액 6,000만 달러를 삭감키로 했다. 

신익희는 3월 중순 국회방미사절단장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정계지도자들을 만나 하원에서 삭감한 대한원조액 전액을 회복시키고,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델레스 주유엔대사 등을 만나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제헌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어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신익희는 광주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되었다. 제2대 총선은 여러 가지 변화가 따랐다. 집권세력과 한민당 출신 유력자들이 대거 몰락하고 남북협상 등 중도파가 다수 당선되었다.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5ㆍ10선거에 불참했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출마하여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보수ㆍ진보의 보혁대결 구도를 이루며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바람을 일으키자,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투옥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조소앙이 조병옥을 누르고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고, 무소속이 과반수를 넘는 126석을 차지했다. 한민당을 계승한 민국당은 참패했다. 제2대 국회는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해 중도파 정치인들이 납북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쟁 중 피해대중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주석 2)

제2대 총선 후 두 달도 안 되어 벌어진 6ㆍ25전쟁만 아니었으면 한국의 정치는 민주와 진보의 방향으로 크게 발전하고, 이승만의 전횡은 많이 제지되었을 것이다. 전체 210석 가운데 무소속에서 126명이 당선됨으로써 정파성이 크게 희석되었다. 

이런 정계의 격랑 속에서 신익희는 의정의 중심축이 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소련제 T- 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밀물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와중에도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챙겨갔다. 직전에 국회에서는 수도사수를 결의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철수'를 통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지 30분 후에 육군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명이 수장되고, 이후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27일 밤 9시경 녹음 방송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는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허위 방송을 내보내었다.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특히 1949년과 1950년의 38선 부근은 남북 양측 군대 사이에 크고작은 충돌이 속출하여 준전시 상황을 방불케했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국방장관 신성모는 "아침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허언장담을 일삼고, 이승만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6.25직전 북한은 기동훈련의 명분으로 군을 38선 인근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방당국은 근거없는 '태평가'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등 군통수권자들의 무능ㆍ무책임으로 북한군은 손쉽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6.25전쟁은 몇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겹쳐 발생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②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500명의 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 ③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고, ④ 1949년 12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 무력침공계획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았다. 

국내적인 요인은 ① 김구ㆍ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정치적 암살, ② 농지개혁의 미진으로 농민의 불만고조, ③ 반민특위 해체로 국민의 분노, ④ 남로당의 붕괴로 남한내부의 '인민혁명' 가능성 희박, ⑤ 5.30총선(제2대 국회)의 결과 반이승만계열 국회다수석 차지로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⑥ 민족해방투쟁의 경쟁 상대로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 ⑦ 북한군에 대한 국군의 병력 열세 등이 지적된다. 여기에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이 적절한 규모의 국지전을 바라고, 남침 정보를 방치했다는 주장과 스탈린의 적극적인 사주론도 제기된다.

북한군은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고, 1949년 2월에는 북ㆍ소간에 군사비밀협정에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 2만 5천 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다.

남한은 1946년 1월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ㆍ해군의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 해병대, 10월에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부가 피난에 급급할 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한국시간)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9대 0으로 결의했다. 소련 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는다. 소련이 북한을 전쟁에 내세워 중국과 미국이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책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으나 초기 전황은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하였다.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ㆍ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 탈환→38선 넘어 진격→평양 점령→국군 일부 병력이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얼마 후 38도선을 넘어 철원ㆍ금화까지 진격하고,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소련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쟁 중 이승만 정부의 군경은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수많은 학살을 자행하고 국민방위군사건으로 1천여 명의 장정이 굶어 죽거나 부상당하는 권력형 비리가 자행되었다. (주석 3)

국회는 1950년 6월 30일 피난수도 부산에 자리 잡고 임시회의를 열어 신익희를 다시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부의장에는 장택상과 조봉암이 선출되었다.


주석
2> 서중석, 『대한민국선거이야기』, 55쪽, 역사비평사, 2008.
3> 김삼웅, 『통사와 혈사로 읽는 한국현대사』, 203~204쪽, 발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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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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