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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사신들과 함께 떠나는 베이징 여행길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선사하는 역사 교양서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등록 2021.09.14 11:59수정 2021.09.1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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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으로 2년 가까이 해외여행이 뚝 끊긴 요즘이다. 1년에도 몇 번씩 해외를 나가는 해외여행 마니아들에게는 너무 혹독한 시절이다. 사람들은 이 시절을 견디는 방법으로 해외여행 유튜버 구독을 택한다. 수십 개의 나라를 누비는 그들의 영상을 보며 댓글들은 한 목소리로 코로나만 끝나면 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말겠다며 다짐한다.

사실 이러한 해외여행 열풍의 역사는 길지 않다. 전두환 정권 때만 하더라도 관광목적의 해외여행은 금지돼 있었다. 1983년에 연령과 재산에 기준을 둔 제한적 관광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하였고 1989년에 이르러서야 해외여행은 완전히 자유화되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이러했으니 조선시대 때는 오죽했으리라. 당시에 합법적으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사신단에 포함되는 것, 즉 사행길에 오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처럼 사신단이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세계와의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손성욱,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푸른역사, 15900원. ⓒ 푸른역사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는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연경, 오늘날의 베이징)으로 향한 조선 사신단의 기록인 연행록, 그중에서도 자그마치 100여 종이나 출판된 19세기의 연행록을 추린 책이다. 책에는 조선 사신단에 의해 기록된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들이 수없이 나열돼있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 하나. 명과 청의 황제는 코끼리에게 절을 받았다
 

베이징 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만국래조도의 일부분. 코끼리의 뒤에 조선 사신의 모습이 보인다. ⓒ 푸른역사

 
명의 건국자인 홍무제는 코끼리를 정례적인 의례 행사에 이용했다. 거대한 코끼리가 황제에게 절을 하면 얼마나 위엄 있어 보이겠는가. 명은 청나라 군대가 북경을 점령하기 불과 8년 전인 1636년까지도 코끼리 6마리를 조회에 참여시켰다.

청은 명의 전례를 충실히 따랐다. 건륭 말기인 1793년에는 북경에 있는 코끼리의 수가 자그마치 39마리에 달했다. 조선이 태종 때 일본에서 보낸 코끼리 한 마리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방을 떠돌게 한 것과 생각하면 확실히 제국 수도로서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청 역시 망국의 길에 접어들면서 1875년 미얀마로부터의 조공을 마지막으로 코끼리는 중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청나라 문인 진균에 따르면 1884년 코끼리 한 마리가 사람을 해치고 궁벽을 부순 뒤로는 코끼리가 의례 행사에 쓰이지 않았고 이후 관리를 받지 못하고 한 마리씩 죽어나갔다고 한다.
 
# 둘. 낙서는 우리네의 유구한 전통?


벽이나 문화재 등에 낙서를 하는 몇몇 한국인들 때문에 국제망신이라는 얘기는 잊힐 만하면 들리는 소식인 것 같다. 그런데 왕명을 받고 상국인 청으로 떠난 사신들마저도 유물에 낙서를 했다.


금나라 때 창건된 법장사는 7층짜리 백탑이 있어 그곳에 오르면 북경 전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조선 사신들 역시 그 장관을 빼먹지 않고 관람했다. 그렇게 관람온 사신들 중 1713년 법장사를 방문한 김창업을 시작으로 백탑 벽면에 제명을 쓰는 이들이 생겨났다.

1833년 백탑에 오른 김경선은 "좌우편 벽의 제명은 다 우리나라 사람의 것이었는데, 친구 중에 연경에 사신 온 자의 것이 많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옛것을 지우고 새로 써서 붓을 댈 만한 곳이 없었다"라고 그 낙서(?)들을 묘사했다. 다행히도(?) 1965년 법장사 백탑은 주변 철로의 안전 문제로 철거되었다고 한다.

#셋. 러시아에게 밀린 조선 사신들

청은 조선 사신에게 숙소와 음식, 땔감 등을 지원해 줬다. 숙소의 이름은 회동관으로 명나라 제도를 이어받는 것이다. 1686년, 전쟁의 화친을 위해 러시아 사절들이 북경에 도착하자 청은 그들을 회동관에 머물도록 했다. 회동관에 이미 묵고 있었던 조선 사신단은 일반 가옥으로 옮겨야만 했다. 러시아는 조선과 같은 조공국도 아니고 전쟁 중인 적국의 사절이었음에도 그들을 위해 조공국인 조선의 사신들이 숙소를 옮겨야 했던 것이다.

이후 1689년 청과 러시아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러시아의 사절단과 상단이 북경으로 파견되었다. 청은 그때마다 회동관을 러시아 사절단에게 머물도록 하였고 그럴 경우 조선 사신들은 회동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옛 사찰을 숙소로 삼아야 했다. 억불숭유의 조선 선비들에게 사찰에 머물게 했으니 사신들 입장에서는 청의 멸시가 한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조선은 조공국 중 나은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적어도 조선 사신은 언제나 내성 내에 머무르는 '특권'을 누렸다. 1717년에는 유구(류큐) 사신이 조선 사신이 도착하자 회동관에서 비능암으로 숙소를 옮기는 일도 있었다. 마치 조선 사신이 러시아 사절 때문에 숙소를 옮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후 회동관은 러시아 사절을 위한 아라사관으로 바뀌게 되고 청은 조선 사신을 위해 옥하교관방이라는 전용 숙소를 제공하게 된다. 비록 러시아에 밀리긴 했지만 조선은 청에게 특별한 조공국이었다.

소국 조선의 아픈 역사도 가감 없이 드러내

이외에도 더 많은 흥미로운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선 사신들의 목욕탕과 사진술 후기나 19세기 초반부터 차르의 명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뤄진 러시아의 중국학 얘기, 사신과 역관들을 통해 중국에 넘어간 우황청심환과 인삼, 조선의 금석문을 탐내는 청의 금석문학자들 등등 말이다.

한편 조공국인 조선이 상국인 청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기 위해 뇌물을 쏟아 붓고 오랑캐라 멸시하는 만주족들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곡을 해 처지를 알리는 모습은 처량하다. 일국의 왕조차 정통성을 타국의 황제를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조공국의 현실을 저자는 가감 없이 파헤친다. 왜 일본이 청과의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첫 번째로 명시했는지가 더 확실히 다가온다.

이때 청의 책봉을 받기 위해 사대부의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린 채 곡을 한 조선 사신은 최석정으로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의 손자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19세기의 조선과 같은 약소국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약소국인 조선일 때나 어엿한 선진국인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최명길과 최석정 같은 사람들처럼 체면이나 명분보다 실리와 앞날을 더 아끼고 위하는 사람들이 나랏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손성욱 (지은이),
푸른역사, 2020


#사신을따라청나라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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