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시간이 늦어지는 중학생 딸에게

아이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지만...

등록 2021.09.15 09:49수정 2021.09.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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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하고 통금시간을 정하면 되겠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 unsplash

 
딸의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버스를 잘못 탔다고 하지만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온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날도 주짓수가 끝나고 친구랑 걸어온다며 밤 10시가 되어 들어왔다. 일찍 들어오라고 하고 통금시간을 정하면 되겠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아이가 내 말을 무조건 수용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중요한 건 다른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행동이면에 숨겨진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아이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부모, 자식 관계는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조차 공유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생각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할 필요가 없다. 아이의 관점을 알고 내 생각을 보태면서 의견을 좁힐 수 있다.     

운영하던 학원을 폐업한 이유 중에 아이들에게 잔소리하기 싫다는 것도 있었다. 왜 지각했냐, 숙제 안했냐, 공부해라, 그런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숙제를 안 했다면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지각을 하게 된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는 이상한 수학선생님이었다.     

나는 중요한 건 행동보다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을 이야기를 하는 게 잔소리 100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커나가고 새로운 상황을 만나는데 그때마다 잔소리를 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권위(설사 그 사람이 부모라 하더라도) 때문에 어쩔 수없이 따르는 것보다 스스로 납득해서 결정했다는 경험을 가지기를 바랐다. 동의되지 않는다면 끝까지 저항하기를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이) 바란다. 인생을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정말 화가 났다. 아니, 두려웠다는 말이 맞겠다. 딸이 7살이었을 때 혼자 건널목을 건너서 빼빼로를 사 온 적이 있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맡에서 빼빼로를 오독오독 먹고 있는 녀석을 보고 "그거 어디서 났냐?" 하니까, 녀석은 천진한 얼굴로 "마트에서 사 왔는데?" 했다. 그 순간 느낀 공포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사고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망가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했다. 망가지면 나는 살 수 없다는 두려움이 어젯밤에도 찾아왔다. 아이와 나와 엄연히 다른 인간이어서 내 불안이 이끄는 대로 할 수도 없다. 이럴 때는 아이를 이성적으로 대할 자신이 없어서 집에 들어온 딸에게 자라고만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쑥 예전에 원망했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아빠가 느꼈을 불안이 이거였구나,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고 폭력으로 느꼈던 행동 너머에 이런 약한 마음이 숨겨져 있다니. 아빠가 가여웠고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우린 왜 그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지 못했을까.     

내가 중학생일 때,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고 집에 오는 것도 아빠는 안된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등하교할 때 같이 해야지, 혼자 버스를 내려서 걸어오는 게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그런 아빠였으니 다른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건 입만 아프게 할 뿐이다. 지금 내가 기억해야 하는 건 동의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순응했던 그 모든 일들이 나중에 뒤틀린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사랑, 불안, 위압, 사회적 관습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것을 이해할만한 어떤 지식도 태도도 갖지 못했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직시하기보다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 입장과 의견에 대해 들어주지 않았던 아빠 자리에 직장 상사나 내가 속한 집단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차지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눈물부터 흘리고 불합리함을 말하지 못했다. 아빠 앞에서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중학생 시절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네가 다칠까 봐 겁이 난다고, 네 말이 맞지만 그냥 아빠 말을 따라주면 안 되냐고 했다면 좋았겠다. 아빠 마음 그대로 보여줬더라면 나는 떡볶이 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거다. 그랬다면 긴 시간 우리가 진심을 알지 못해 멀어지는 일은 없었을 거고 나도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거다. 이제는 당시에는 보지 못한 아빠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었다.     

다음날 딸의 빼빼로부터 나의 떡볶이까지 펼쳐놓고 내 마음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지만, 일요일 늦잠을 자는 아이를 깨울 배짱이 내게는 없었다. 녀석은 세상 편하게 자고 있는데 나만 지금 안달하는거지, 하면서 과감하게 밥을 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하얀 음료로 건배 ⓒ 김준정

 
사랑과 복종밖에 모르는 반려견 보미와 청암산 등반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딸이 설거지를 해놓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려놓았다. 반성한다 이거지. 가스레인지까지 (처음으로) 닦아놓을 걸 보고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밥을 했다.       

로컬푸드 매장에서 장을 본 걸로 죽순 들깨 볶음, 얼갈이배추 무침, 된장찌개, 목살구이를 만들었다. 하얀 음료 두 잔을 따라서 초밥이와 건배를 했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자두 먹고 싶다" 했는데 녀석이 못 들은 척하길래, "아, 맞다. 나 어제 화났었지?" 하니까 딸이 자두를 썰어서 대령했다.      
#딸 #귀가시간 #중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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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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