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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옷깃에 '세 손가락 배지'를... 예상이 적중했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올해 한가위엔 미얀마 친구들을 기억하겠다는 아이들

등록 2021.09.24 07:26수정 2021.09.2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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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나눔 행사는 우리 학교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한가위와 성탄절, 이렇게 1년에 두 번 치르는 학생회 주관의 학교 행사다. 안팎으로 들뜨기 쉬운 시기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떠올려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인성 교육의 일환이기도 하다.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학급별로 사과를 모으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사과 한 알씩을 가져와 상자에 담아 가까운 돌봄 기관을 직접 찾아가 전달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사과 모으기'였던 셈인데, 지금까지도 한가위 나눔 행사의 공식적인 명칭이다. 

그런데, 학급별로 현물을 모으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생겼다. 크기도 들쭉날쭉한 데다 생채기가 나서 건네기 힘든 것들도 많아 '애써 주고도 욕먹는' 일도 흔했다. 아이들의 정성과 사랑이라는 말로 눙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 계속됐다. 

십수 년 전부터는 사과 한 알 값을 각자 기부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 또한 문제가 없진 않았다. 쉽고 편한 대신 나눔의 취지가 시나브로 희미해졌다. 자발성도 약해진 데다 해마다 세밑이면 관행적으로 하게 되는 불우이웃돕기처럼 여기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언뜻 학급별로 할당된 '1/N' 느낌이어서 아이들은 물론 담임교사들조차 시큰둥해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기부는 받는 이들도 찜찜한 법이다. 비록 볼품없고 부족하더라도 아이들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사과가 교육의 본령에 더 부합한다는 성찰이 잇따랐다.

두 마리 토끼 : 모금의 의미와 액수
 

자발적으로 모금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별도 제작한 세 손가락 배지 덕도 봤지만, 무엇보다 손팻말을 들고 독려하는 학생회의 헌신 몫이 컸다. ⓒ 서부원

 
결국 관행적인 학급별 기부 방식을 접고 순수한 모금 행사로 운영하기로 했다. 액수가 턱없이 적어질 걸 감수하더라도 공감과 자발성이라는 교육적 가치가 먼저라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열 사람의 관행적인 기부보다 한 사람의 자발적인 참여가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회가 더욱 분주해졌다. 주제와 기부할 곳 등이야 교사들과 협의한다지만, 모금 행사를 직접 운영해야 하므로,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으로서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대견한 아이들이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에 팥빙수를 만들어 팔았다. 한가위 즈음에도 낮엔 여전히 무더워 급식소에서 나오는 아이들에게 디저트로 제격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예상은 적중했고, 함께 노력한 만큼 모금의 의미와 액수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다. 

코로나로 도움이 필요한 곳은 늘었는데, 팥빙수 판매와 같은 모금 활동을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됐다. 방역지침을 고려하여 다른 효과적인 모금 방식을 찾아야 했다. 코로나를 핑계 삼아 나눔 행사 자체를 취소하게 되면 다음에 다시 꾸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행사를 경험한 아이들이 졸업하고 없기 때문이다. 

모금 방식에 대한 고민도 고민이지만, 이웃돕기라는 주제도 관행화하여 아이들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말하자면 시의성 있는 주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역 사회의 돌봄 기관을 후원해온 오랜 관행을 이제 바꿀 때도 됐다는 거다.

배움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미얀마 친구들 돕기

오랜 숙의 끝에 올해의 한가위 나눔 행사의 주제가 정해졌다. 혼란 속에 배움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미얀마의 친구들을 돕자는 것. 반년이 넘도록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을 향한 연대와 응원의 의미를 모금 활동에 담아보자는 취지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 등의 혼란 속에 가장 큰 피해자는 늘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개인과 사회를 피폐하게 만든다. 삶의 터전이 파괴된 채 연필 대신 총을 들어야 하는 그들이 향후 만들어갈 세상이 온전할 리 없다. 

교사들은 홍보 영상을 준비했고, 학생회 아이들은 손팻말을 만들었다. 특별실에 있는 스탠드형 TV를 가져와 설치하고, 작은 모금함을 준비했다. 한가위 연휴를 앞둔 한 주 동안 점심시간을 이용해 모금 활동을 전개하도록 정하고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것만으로는 2% 부족했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선의를 즉시 보상해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신의 작은 정성이 미얀마의 친구들에게 전해져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으리라 믿는 것과는 별개로, 당장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기부를 독려하는 '당근'으로써도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제작된 것이 '세 손가락 배지'다. 검지부터 약지까지 세 손가락을 모으는 건,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을 배지로 제작해 가슴이나 옷깃에 상시 달고 다닌다면, 민주시민교육의 효과도 거둘 수 있어 일석이조의 묘안이라 여겼다. 

일반적인 철제 배지 크기의 흰색과 검은색 두 종류로 제작했다. 흰색인 여름철 교복엔 검은색 배지가, 색깔이 있는 사복이나 춘추복 블라우스에는 흰색 배지가 도드라져 보이도록 고려한 것이다. 모금 활동에 참여하면 '기부 인증서' 삼아 선물하기로 했다. 

다만, 일정 액수 이상을 기부해야만 준다는 조건을 붙였다.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천 원짜리 지폐를 모금함에 넣는 아이들이 꽤 있었지만, 그들에겐 배지를 줄 수 없어 일일이 양해를 구했다. 모금 활동이니만큼 적자를 봐서는 곤란하다. 

근래 최고의 한가위 선물이 되다
 

교복과 생활복의 가슴과 깃에 단 세 손가락 배지. 아이들은 이 배지를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 서부원

 
꼭 배지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처음엔 쭈뼛거리던 아이들도 친구들과 함께 모금함을 찾아왔다. 주관하는 학생회 아이들에게 배지는 이미 신분증 같은 게 돼버렸다. 그들의 가슴엔 노란 세월호 리본과 5.18 주먹밥 배지를 지나 어느새 '세 손가락 배지'가 달려있다. 

얼마 전 그들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취지로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와 연출을 하며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다. 교사로서 당시의 감동을 기사화했고, 영상을 몇몇 미얀마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이번 모금 활동은 그들의 1년 후배들이 앞장서고 있다. 선배들의 선한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후배들에게 스며드는 모습이다. 모금액의 크기와 상관없이 5.18 민주화운동의 도시 이곳 광주의 아이들이 미얀마의 또래 친구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로서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점심시간 모금 활동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준비한 200개의 배지가 모두 동이 났다. 수그러들지 않는 관심을 보건대, 더 주문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등하굣길 배지를 본 다른 학교 아이들의 시샘까지 받고 있어 '나비 효과'까지 은근히 기대된다. 

코로나 와중이지만, 올해 한가위 나눔 행사도 이구동성 성공적이라며 뿌듯해했다. 학생회의 헌신과 아이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다. 내게도 '세 손가락 배지'는 근래 최고의 한가위 선물이 됐다. 미얀마의 고통받는 또래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아이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미얀마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군것질을 한 번 참자는 아이들의 외침이 오늘도 교정에 울려 퍼지고 있다. 천둥벌거숭이들이 부쩍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 뭉클하기까지 하다. 비록 며칠 점심시간의 활동일 뿐이지만, 아이들의 배움이 꼭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부디 아이들의 사랑과 정성이 미얀마에 가닿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미얀마 민주화 #세 손가락 배지 #한가위 나눔 #고등학교 학생회 #모금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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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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