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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친구가 '정규직 전환 계획'에 콧방귀 뀐 이유

[차별금지법과 나] '차별하면 안 된다'는 당연한 명제가 당연해지기를

등록 2021.09.18 16:55수정 2021.09.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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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차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법입니다. 기획 '차별금지법과 나'에서는 시민기자들이 주변에서 보고 직접 경험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합니다. 많은 시민기자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아주 평화로운 날이었다. 여름휴가였고 본가에 가서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때마침 올림픽 기간이라 경기도 보며 몸도 마음도 여유 있게 보냈다. 그날은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러 나선 날이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선, 좋아하시는 미스터트롯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내 일상 얘기, 엄마 취미생활로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엄마 친구의 친구의 아들 얘기를 꺼냈다. 갑자기?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다. 엄마 친구의 친구의 아들(엄친아)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준비하는 곳은 공기업인데 계속 불합격을 받아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공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게 너무 불공정하다는 얘기다. 평소에 시사·경제·정치 같은 사회문제로 엄마와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었기에 꽤나 당황했는데 그 주제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 더 당황했다. 

'차별하면 안 된다' 먼저 설명해야 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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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유니온이랑 민달팽이유니온,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참여연대가 한창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에 대한 비난들이 쏟아질때 비정규직 차별 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 청년유니온

 
엄마는 시험을 치고 들어오지 않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건 잘못된 거라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정규직으로 취업하려고 공부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게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의 대우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시험을 봐야지, 시험을 보지 않고 정규직과 똑같은 월급을 받는 건 틀렸다는 거다. 

나는 정규직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며, 시험을 기준으로 고용형태와 복지에 차등을 두는 건 차별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게 왜 차별인지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차별하는 게 그리 잘못된 건 아닌 것처럼 말했다. 나는 무척 당황했는데, 그게 왜 차별인지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부터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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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박대성 지부장과 노조원들이 6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규직 전환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했다. ⓒ 유성호

 
이런저런 생각에 혼란했다가 친구랑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친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회사 내에서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정규직과 똑같은 업무를 했지만 동료들로부터 괴롭힘과 무시를 받았다. 그러던 중 친구가 일하던 기업이 당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 정책에 동참한다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선언했다. 친구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름만 정규직이지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는데도, 다른 새로운 임금체계, 직급체계가 만들어져서 받는 대우는 바뀌지 않았으며 기존에 정규직이었던 직원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건 여전하다고 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국 사회의 아주 오랜 '상식'이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는 시민의 발이 되어 주는 지하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는 여기서도 한국 사회의 슬픈 일면을 마주하게 되는데, 견학을 온 특성화고 학생들도 이미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낮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들이 일을 하게 될 경우 정규직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순응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도 함께 녹아 있다. '차별해도 괜찮다' 식의 인식은 차별을 하는 사람, 당하는 사람 할 것 없이 세대를 불문하고 만연해 있다.


사회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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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 픽사베이


돌이켜보면 나도 시험으로 차등을 두어 대우를 달리 하는 걸 차별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는 공정하다고 여겼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해 시험을 쳤고 그 시험 점수에 따라 시끄러운 교실이 아닌 관리가 잘된 자습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런 차별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나는 시끄러운 교실에서 자습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무엇이 차별이고 왜 차별을 하면 안 되는지 고민해보자. 청년유니온에는 조합원들과 함께 만든 '평등·존중·환대의 공동체를 위한 청년유니온 약속문'이 있다. 약속문은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청년유니온의 주체이며, 나이, 성별, 성적 지향과 정체성, 장애, 신체조건, 출신지역, 학력, 사회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평등합니다'로 시작한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도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너무나도 치열한 경쟁과 시험이라는 단편적인 기준으로 줄을 세우고 그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 사회를 겪어오며 능력주의에 입각한 차별을 자각하지 못했다. 이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차별이 차별인 줄 모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어떤 차별은 공정한 거라고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게 성별이든 고용형태이든 아파트 브랜드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 사회에 어떤 형태의 차별이 있는지, 당신이 하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차별인지 얘기해 줄 원칙이 필요하다. 그 원칙을 시작으로 차별을 해소해나갈 수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그러한 시작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채은 시민기자는 청년유니온 위원장입니다.
#청년유니온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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