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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쟁 터지자 남쪽으로 피신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45]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초기, 도망치느라고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등록 2021.09.21 14:59수정 2021.09.2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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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독서하기> 압록강변의 겨울 6.25 당시 피폭된 한강철교 ⓒ 김동환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소련제 T- 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 경에야 남침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전면남침 보고를 6시간 뒤에야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국난의 시간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긴급 국무회의는 전쟁발발 10시간이 지난 오후 2시에 열렸다.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엉터리 보고를 하였다. 채병덕은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 중이며 곧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실제로 그 시각 제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와중에도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챙겨갔다. 직전에 국회에서는 수도사수를 결의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철수'를 통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지 30분 후에 육군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명이 수장되고, 이후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27일 밤 9시경 녹음 방송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는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허위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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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조병옥 내무부 장관. 1951.3.23 ⓒ 연합뉴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27일 새벽 4시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정부의 천도를 의결하고,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했는데, 이는 그대로 미 국무부에 보고되었다. 대전에서 4일을 머문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했고, 7월 2일에는 목포에 도착하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초기의 로얄 타임을 도망치느라고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특히 1949년과 1950년 38선 부근은 남북 양측 군대 사이에 크고작은 충돌이 속출하여 준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신성모는 "아침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허언장담을 일삼고, 이승만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한편 북한군의 전면 남침을 보고 받은 신익희는 즉각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26일 새벽 2시경 성원이 되었다. 국회는 조소앙의 발의로 〈국회는 정부와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수도는 우리 나라의 심장부이므로, 우리는 사기의 앙양으로나 전략적 견지로나 끝까지 이를 보위할 것이다. 다만 실지항전(實地抗戰)에 관계 없는 비전투원 즉 부인ㆍ소아ㆍ노약자 등은 미리 소개하여 장병의 치열한 전투에 마음껏 활동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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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5. 29. 서울. 중국군 춘계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세 번째로 피란봇짐을 꾸려서 한강을 건너고자 몰려들고 있다. 피란민들이 한강철교의 단절로 부교로 남하하고 있다. ⓒ NARA

 
유엔군은 우리 국군을 원조하여 여러 가지로 작전시설을 하는 중이므로 우리는 이에 신뢰하는 바이다. 천조자조(天助自助)의 원칙에 의하여 우리 자신의 혈투가 선행되고야 우군의 원조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항전력 있는 이들이 총무장하여 수도 서울 방위에 전력할 것이요, 이 전투에 흘리는 고귀한 피는 불행한 경우에 적에게 무수히 학살될 수백만 동포를 구하는 동시에 조국의 운명을 구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장동지(武裝同志) 및 무장할 수 있는 동지들은 조국의 존망을 두 어깨에 지고 끝까지 수도보위(首都保衛)를 위하여 분투하기로 서로서로 서약하고 투쟁할 것을 기대하는 바다. 

우리가 모든 고난을 참고 끝까지 싸우면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올 것이다. 전 세계 50여 국은 우리의 편이요, 인류사의 정의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싸우는 동시에 전 인류를 위하여 싸우는 역사적 투쟁에 필승을 확신하는 바이다. (주석 1)


주석
1> 유치송, 앞의 책, 56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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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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