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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는데... 빨치산으로 몰려 죽은 화전민들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동리 쌍계마을 민간인학살... 살아남은 가족도 감시당해

등록 2021.10.23 14:52수정 2021.10.2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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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대-박종만이 학살된 쌍계마을 길가. 사진은 박종대의 동생 박종태. ⓒ 박만순


1974년 어느 날.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동리 이장 박종태(1934년생)가 영해지서 문을 열었다. "지서장님, 안녕하신교." "박 구장(이장), 오셨구만이라." 박종태는 다른 순경과도 인사를 나누고 이종만(가명) 차석 책상 의자에 앉았다. "박 구장요. 매년 해봤으니께네 잘 아시지라?" "그라믄요." "그람 부탁허요."

박종태가 앉은 이종만의 책상에는 두툼한 서류철이 놓여 있었는데, 다름 아닌 <영해면민 신원편람(편람)>이었다. 편람에는 영해면민 중 국가보안법 위반자나 6.25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월북자 등 '신원 특이자'에 대한 동정이 기록돼 있었다. 편람은 각 사건 별로 다른 색깔 종이로 구분돼 있었다. 

지서에 빨강 딱지 서류가

편람에는 자신이 이장으로 있는 대동리 관련 기록도 있었다. 박종태는 특별한 감회에 젖었다. 문서에 거론된 이들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25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는데, 대부분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은 자들이고 또 일부는 북한군이 점령한 인공 시절 감투를 쓴 죄로 행방불명된 자들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죽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박종태의 얼굴이 눈물로 젖었다. 들킬세라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편람에 특별히 손 볼 것은 없었다. 시골이라 특별한 변동 상황이 없었을 뿐더러 6.25 때 행방불명된 자가 다시 나타날 리도 만무했기 때문이다. 다만 관련자의 가족이 이사를 하거나 사망할 경우에만 그 사실을 새롭게 기입했다. 서류를 쭉 넘기던 박종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강 종이에 '박종대'라는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박종태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관계란에는 '부재자(不在者)의 제(弟, 형제)'라고 돼있었다.

박종태의 형 박종대는 한국전쟁이 나기 1년 전인 1949년에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저세상으로 갔다. 박종대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며 봉화산과 명동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군인에 의해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집안의 한이 된 형의 이름과 그 동생이라는 이유로 자기 이름까지 경찰 감시 서류에서 나오니 박종태의 눈이 뒤집힐 만했다.

"이 차석요. 이기 어떻게 된교?" 이종만 차석은 "아. 그기 말이요..." 하면서 쭈뼛거렸다. "울 행님이 빨갱이 짓을 하다 죽은 것도 아닌데, 와 여기 있는교?" "박 구장. 상부에서 내려 온 지시라 할 수 없었대이. 구제 기간에 어떻게 해볼 끼구만." 1974년 박종태가 항의한 지 몇 달 만에 '박종대'라는 빨간 서류는 없어졌다. 하지만 편람 속 다른 이들의 빨강 딱지는 그대로 남았다.


가난한 화전민 마을

"회장님, 여기에 버스가 다녀요?" "하루에 두 대 다닙니더." 영해면 대동리 가는 길은 험하기만 하다. 급경사에 고부랑길이 이어졌다. 그런 탓에 승용차 조수석에 탄 영덕군 김달호 유족회장에게 버스가 다니는지 물어본 것이다. 요즘은 시골길도 웬만하면 도로 포장이 돼있다. 집 앞까지 콘크리트 포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동리 가는 길에는 비포장도로가 상당히 많았다. 마치 승용차로 산악자전거 도로를 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이런데 6.25 때 이곳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했다. 큰길에서 한참을 올라가니 '대동리' 마을 이정표가 보였다. 이정표에서 더 가니 원래 목적지인 쌍계마을에 도착했다. 영덕읍에서 80리(32km) 길인 쌍계마을에는 이제 두 가구밖에 없다.

70여 년 전 1940년대 이 작은 쌍계마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영덕군 봉화산 자락의 쌍계마을에는 한국전쟁 전부터 빨치산이 활동했다. 1949년 봄 군경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폈다. 그리고 4월 25일 빨치산을 도왔다며 박종대(당시 20세)와 박종만(당시 21세)이 군인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둘은 사촌 형제였다.

대동리 쌍계마을은 살기 어려운 오지다.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한 때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지대라 논이 없어 산에 불을 질러 밭을 만들었다. 그렇게 화전 마을을 일구어 서속, 콩, 팥, 메밀을 심었다. 한국전쟁 전 대동리에는 70~80가구가 살았다. 하지만 쌍계마을은 4가구에 불과했다. 고작 4가구뿐인 화전민 마을에 정말로 좌익 활동가가 살았을까. 그런데 대한민국 국군은 빨치산에 협조하는 빨갱이(?)를 사살했다고 했다.

생과 사
 

빨치산이 활동했던 경북 영덕군 봉화산 자락 ⓒ 박만순


당시 영해면에 주둔한 군인과 영해지서 경찰 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쌍계마을 주민에게 수시로 "빨치산 소재지를 대라!"며 윽박질렀고, 손발을 묶고 죽지 않을 만큼 팼다. 쌍계마을을 포함한 대동리는 매일이 지옥이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해지서에서 나와 매타작을 했기 때문이다.

대동리 주민들을 괴롭힌 건 경찰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 돼 주민들을 떨게 했다. 1949년 초가을 어느 날 빨치산이 피난 가는 박돌이와 신필수(가명) 내외를 영해면 대동리 공동묘지에서 붙잡았다. 국군토벌대는 1949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사전조치로 주민들에게 대대적인 소개령을 내렸다. 빨치산의 식량과 물품 제공의 원천이었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빨치산들을 고사시키는 전략이었다. 빨치산 입장에서 보면 주민의 피난은 반길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피난 가는 주민을 붙잡은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주민으로부터 인심을 잃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박돌이와 함께 피난을 가다가 공동묘지에서 빨치산과 맞닥뜨린 박종태(당시 집 나이 16세)는 "우리 아버지를 와 잡아가는교?"라고 했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주민들은 속칭 새번디마을로 연행됐다. 빨치산 간부가 부하에게 물었다. "이 어른은 왜 끌고 왔냐?" "주민들에게 피난 가라고 선동한 노인넵니다." "이 어른은 아들도 하나 죽고 했으니, 풀어 줘라." 박돌이 장남 박종대가 국군에 의해 총살당한 얘기였다. 그 간부는 대동리와 쌍계마을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박돌이는 지옥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지만, 신필수 내외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 부부는 빨치산에 의해 쌍계마을 골짜기로 끌려가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신필수 부부는 왜 죽었을까? 주민 증언에 따르면 신필수는 지서에 빨치산 활동을 밀고했다고 한다.

군인과 빨치산 틈새에서 살아난 자들

그렇게 1949년 초가을  주민들이 피난을 갔고 그해 겨울 군·경은 대동리에 들어와 가옥을 불질렀다. 대동리 70~80가구가 전소된 후 빨치산 활동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동리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1950년 봄, 강남 갔던 제비와 함께 일군의 사람들이 마을로 발길을 향했다. 빨치산과 군경의 출입이 잠잠해지자 원주민들이 삶터로 모여든 것이다.

어차피 산자락에 불을 질러 농사를 짓는 화전민 마을이었던 터라 그들이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동리에도 봄이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3개월도 채 안 되어 6.25가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원 소집명령이 내려졌고 박돌이의 며느리 권달희(박종대의 아내)와 동생 박재삼은 영덕경찰서로 갔다.

이후 1950년 7월 15일 권달희와 박재삼은 영덕군 내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같이 영덕면 뫼골에서 국군 제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들에 의해 학살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박재삼은 시신을 수습했지만 권달희는 그마저도 못했다. 군인과 빨치산의 틈새에서 살아난 쌍계마을 권달희와 박재삼은 그렇게 세상을 하직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던 쌍계마을에서는 1949년 4월 25일 박종대와 박종만이, 1950년 7월 15일에는 권달희와 박재삼이 학살되었다. 1949년 초가을에는 박돌이가 죽음의 구렁텅이까지 갔다가 살아 나왔다. 또 전쟁의 피해자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박돌이의 아들 박종태(88세,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동리)는 전쟁 후 20년 넘게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화전마을에도 전쟁의 상처는 그렇게 깊었다.
#화전 마을 #빨치산 #영해지서 #국민보도연맹 #대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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