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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최초 사투리 연구서 저자는 일본인이었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경성제국대학 초대 도서관장, 오구라 신페이 ①

등록 2021.10.03 11:41수정 2021.10.0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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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는 세월 동안 조선 곳곳을 누비며, 우리말을 연구한 사람이 있다. 조선인조차 관심 갖지 않던 팔도 사투리를 연구한 그는, 천년 넘게 풀리지 않던 신라 향가(鄕歌)의 수수께끼를 해독했다. 조선인보다 더 우리말 연구에 몰두한 그는 누구일까? 바로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다.

오구라 신페이는 1882년 6월 4일 미야기현(宮城縣) 센다이시(仙臺市)에서 태어났다. 오구라 신페이의 형 히로시(小倉博)는 국문학자(일문학자)였고, 동생 츠토무(小倉勉)는 지질학자, 츠요시(小倉强)는 건축학자, 켄(小倉謙)은 식물학자였다. 그가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오구라 신페이는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 지도 아래 일본어 연구를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국어의 음운 변천>(平安朝末期に至る國語の音韻變遷)이라는 논문으로 졸업한 그는, 1906년 도쿄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가 '우리말'에 관심 가진 이유
 

도쿄제국대학 언어학과 교수진과 오구라 신페이 도쿄제국대학 출신은 근대 언어학 연구를 선도하면서, 동아시아 지역 언어의 선구적 연구자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도쿄제대 언어학과 교수진 사진이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오구라 신페이다. 도쿄제대 대학원 재학 시절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 <조선어 방언 사전>(한국문화사)

 
대학원에서 그는 국어연구실 조수로,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이하 후유(伊波普猷),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와 함께 연구에 몰두했다. 오구라 신페이는 조선어 고어(古語)와 방언을, 이하 후유는 류큐어를, 긴다이치 교스케는 아이누어를 각각 연구했다.

일본 사람인 오구라 신페이는 왜 '우리말'을 연구했을까?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남겼다.

"내가 조선어를 알게 된 것은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郞) 선생 덕분이다. 메이지 39년(1906년) 내가 도쿄제대 언어학과를 졸업할 당시, 가나자와 선생은 '일선양어동계론'(日鮮兩語同系論)을 발표하여 학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나도 이때 조선어에 대한 이상한 흥미와 함께,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선 가나자와 선생에게 언문(諺文)을 배웠다. 한일합병이 되기 전인 메이지 43년(1910년) 조선에 와서는, 소위 총독부 편집서기란 직함으로 남산정(南山町)에 머물면서, 일본어는 조금도 모르는 최아무개(崔某)에게 부탁해서 "문을 열어주세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같은 평소 쓰는 말부터 손짓발짓으로 배웠다. 그러나 관청에 매인 몸이라 말을 배우며 규장각에서 고문서를 찾아볼 시간이 없어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마에마 쿄사쿠(前間恭作) 두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많이 받았다."

1910년 조선으로 건너온 오구라는,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에서 편수서기와 편수관으로 일했다. 1914년부터는 총독부가 추진한 <조선어사전> 편찬과 '언문 철자법' 작업에 참여했다. 1919년 6월에는 총독부 편수관으로 교과서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교과서 조사위원을 지냈다.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오구라는 우리말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언어학도였기에 조선어에 흥미를 느끼고 천착하지 않았나 싶다. 그가 1920년 발간한 <조선어학사>와 1940년 발간한 <증정 조선어학사>는 오늘날에도 연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오구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조선어학사>는 우리말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연구한 책이다. 조선의 어학 기관부터, 조선어학, 일본어학, 지나어학, 만주어학, 여진어학, 거란어학, 기타어학까지 다루고 있다. 1920년에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위하여>, 1923년에는 <일본어와 조선어 발음 개설>을 펴냈다. 일본말과 우리말을 비교 연구한 저작이다.

오구라 신페이는 역사와 계통에 관심을 두고,우리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헌 자료를 수집.정리하는 동시에, 방언 연구를 통해 우리말의 특질과 역사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왜 '사투리' 연구에 몰두했을까
 

남산 조선총독부 청사 남산 조선총독부 건물은, 원래 1907년 2월 통감부 청사로 지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로 바뀌었다. 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에 신청사를 완공하면서 이전했다. 그후 남산 총독부 청사는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으로 쓰였다. 오구라 신페이는 남산 조선총독부 시절에 학무국 관료로 일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우리말의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오구라는, 향가 해독과 방언(사투리) 연구에 몰두해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오구라는 <조선어 방언 연구>에서 '일시적인 흥미'로 방언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그가 연구에착수한 이유는 문헌 자료만으로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말 어휘가 부족하다는 점도, 방언 연구에 착수한 계기였다.

오구라는 조선 곳곳을 답사하면서 방언을 조사했다. 1914년 제주도(1911년 조사, 1930년 재조사)를 시작으로, 황해도 서부(1913), 경남(1915), 경남과 경북(1916), 충남(1918), 전남(1919), 전북과 충북(1922), 경북(1923), 영동(1923), 영서(1928), 경원선 주변(함남 영흥.고원.문천.원산.안변.고산, 강원도 평강.철원, 경기도 연천, 1917), 함남과 함북(1927, 1930), 평안도(1929) 방언을 차례로 조사했다.

방언 조사를 바탕으로 오구라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기관지 <조선휘보>(朝鮮彙報)를 비롯해 <조선>(朝鮮)과 <조선어>(朝鮮語) 같은 잡지에 연구 논문을 차례로 발표했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방학을 이용해서 꾸준히 우리말 방언을 연구했다. 오구라는 우리말 방언 연구에만 20년 넘는 세월과 정열을 쏟았다. 방언 연구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말할 것은 조사(답사) 여행에 관한 것이다. 조선 각지는 지금은 철도와 해운이 발달했고, 자동차 도로도 완비되어 있지만, 지금부터 십수 년 전에는 교통수단이 대단히 열악했다. 말을 타고 여행을 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긴 조사 기간에 비해 충분한 결과물을 낼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가 20년 넘게 우리말 방언을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1912년 오구라가 제주도 방언을 연구하러 떠났을 때,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답사 처음부터 끝까지 제주 지역 경찰서에서 순사보 한 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대정읍에 도착했을 때는 보통학교 교원과 학생이 마을 입구에 도열하여 그를 맞았다고 한다.

총독부는 왜 오구라의 방언 연구를 지원했을까? 지배권력 입장에서 의사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선말 연구는 통치자 입장에서도 시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다만 조선 팔도의 방언까지 수집해서 통치에 활용한 조선총독부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35년 동안 세밀하고 촘촘한 통치를 통해, 일제가 조선을 얼마나 수탈했는지 알 수 있다.

휴가 때도 떠난 사투리 수집 답사
 

경성제국대학 전경 일본은 도쿄(1886), 교토(1897), 도호쿠(1907), 규슈(1911), 홋카이도(1918)에 이어, 제국 내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경성제국대학(1926)을 설립했다. 제국대학은 총 9개가 문을 열었다. 경성제국대학 이후 다이호쿠(1928), 오사카(1931), 나고야(1939)에 문을 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가 식민지에 처음 개설한 제국대학이다. 사진 왼쪽 건물이 경성제대 법문학부이고, 오른쪽이 본부 건물이다. ⓒ 서울대학교

 
오구라는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된 1926년 이후부터는, 경성제대의 지원을 받아 방언 조사를 이어갔다. 경성제국대학이 조선 통치의 학술 지원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방언 연구를 위해 그는, 일 년에 한 번 주어지는 휴가 기간에도 답사를 떠났다. 다른 사람이 본국이나 만주여행을 떠날 때도, 그는 오지나 다름없는 조선 방방곡곡을 떠돌며 방언 연구에 몰두했다. 오구라가 남긴 회고다.

"원래 나는 결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조선 내지를 굳이 여행한 것은,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나는 공무로 조선에 올 때마다 지금도 여유가 생기면, 시골에 가서 지식 축적을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제대의 지원이 있었다 하더라도, 20년 넘게 우리말 방언을 연구한 오구라의 열정과 헌신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 방언 조사 과정에서 조선인 여관에 묵었던 그는, '똥돼지'에 관한 일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아침 일찍 용변을 보러 가니, 놀랍게도 아래쪽에서 돼지가 콧소리를 내며 배설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뛰쳐나와서는 용변도 보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1914년 8월 그는 쓰시마(対馬) 방언과 우리말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부산에서 150톤 규모 기선 덴신마루(天眞丸)를 타고 쓰시마로 향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 때문에 독일 함정이 일본 바다에 출몰해서 선박 운항을 위협했다. 지적 호기심을 위해 그가 얼마나 위험을 무릅쓰고 연구에 매진했는지 알 수 있다.

오구라는 어떻게 우리말 방언을 연구했을까? 각 지역 군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조사 지점을 추가해서 총 259개 지점에서 방언을 연구했다. 이런 방식으로 조선 전역을 망라했다. 오구라의 방언 연구 지점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전남(제주 포함) 29개소, 전북 15개소, 경남 21개소, 경북 26개소, 충남 22개소, 충북 10개소, 경기 20개소, 강원 26개소, 황해 18개소, 함남 20개소, 함북 15개소, 평남 17개소, 평북 20개소다.

조사 대상은 보통학교 고학년 남녀 학생 10명을 뽑아서 연구했다. 방언을 많이 알고 있는 노인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들이 장시간에 걸친 조사를 힘들어했다. 어쩔 수 없이 젊은 학생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말 최초 방언 연구서 탄생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교수와 학생 오구라 신페이는 다카하시 도루와 함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교수로 학생을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서 한국 국어학계와 도서관계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여럿 배출된다. 앞줄에 앉은 사람 중 왼쪽이 오구라 신페이다. ⓒ 최종고 외<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푸른사상)

 
오구라 이전에는 우리말 방언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시도 자체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600에서 700개 말을 선정해서 방언을 수집했다. 우리말 <방언채집부>(方言採集簿)가 따로 없어서, 오구라는 일본에서 쓰는 <방언채집부>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사가 끝날 때마다 오구라는 방언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제주도 방언>(濟州島方言 1913)을 비롯해, 그가 발표한 우리말 방언 논문만 40편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말 최초의 방언 연구서가 탄생했다.

오구라의 연구를 집대성한 <조선어 방언 연구>(朝鮮語方言の硏究 1944)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출간됐다. 1944년 6월 15일 이와나미쇼텐을 통해, 상하 2권으로 발간됐다. <조선어 방언 연구> 상권은 수집한 방언 자료를 내용별로 정리한 '자료편'이다. 하권은 오구라의 논문을 가려 뽑아 수록한 '연구편'이다. 상권은 20세기 초 조선 팔도 방언 자료를 망라해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여 년의 세월을 쏟아부었음에도 오구라는 자신의 연구에 많은 결함이 있음을 인정했다. 오구라의 방언 연구는, 짧은 기간 동안 지역조사를 진행한 터라 방언 수집이 완전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우리말 방언학이 체계적으로 성립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오구라 신페이는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개교와 함께, 그는 법문학부 교수로 임명되어 조선어를 연구하고 가르쳤다.

조선어문학과 교수인 오구라에게 배운 제자가 조윤제, 이희승, 이숭녕, 이재욱, 방종현, 김사엽이다. 이들은 훗날 우리 국어학과 도서관 분야에서 활약한다. 최경봉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국어학 분야 1세대 학자인 이들에게, 오구라 신페이,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고노 로쿠로(河野六郞) 같은 경성제대 교수진은 큰 영향을 미쳤다.

교수가 된 오구라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초대 관장도 함께 맡았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의미의 대학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개교했다. 대학도서관 역시 일제강점기에 처음 개관했다. 그렇게 이 땅에 처음 문을 연 대학도서관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다. 오구라 신페이는 1926년, 이 땅에 처음 개관한 근대 대학도서관의 초대 수장을 맡았다. 이 의미는 적지 않다.

1926년 4월 20일 오구라 신페이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관장에 임명되었다. 사서관에는 데라사와 치료(寺澤智了)를, 사서로 세키노 신키치(關野眞吉)를 임명했다. 세키노는 1940년 경성제대 도서관에 입사하는 이봉순에게 분류를 비롯한 도서관 업무를 가르친 사람이다.

- 다음 기사 천년의 수수께끼 신라 향가를 해독한 최초의 인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도서관 #오구라 신페이 #경성제국대학 #소창진평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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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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