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랑 콩깍지 깔래?

등록 2021.10.13 10:42수정 2021.10.1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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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리세요? 주소 불러드릴게요.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신발 할 때 신, 봉지 할 때 봉, 신봉동이요."

허리가 많이 굽고 연로하신 큰어머니가 고구마를 캤다며 택배로 보내주시기 위해 온 전화통화였다. 새로운 도로명 주소는 귀가 어두운 큰 어머니께 불러들이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 나는 번지 주소를 큰 소리로 알려드렸다. 아침에 잠겨있던 내 목은 쩌렁쩌렁하게 주소를 몇 차례 외치고 나니 트이는 듯했다.

"그려. 고구마는 내가 농사 진건 게 맛있는지는 나도 몰러. 그래도 택배가 오면 신문지 깔고 하루 이틀 널어놔야뎌. 알겠지? 그리고 콩도 좀 땄으니까 콩을 까서 냉동실에 뒀다가 콩밥 해 먹어. 먹을 땐 씻어 먹는겨. 콩이 좋은 거여."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우리 집 문 앞엔 묵직한 택배 상자가 와 있었다. 나는 택배 박스를 뜯는 순간...

"으악~~~~ 뭐야!!!!!!! 조금 보낸다던 콩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참고로 난 콩밥을 싫어한다. 그리고 일하는 것(콩까는 것)도 싫어한다.

나는 다양한 선택지를 생각해봤다.

1. 엄마한테 바로 갖다 준다.
(손가락 관절과 허리 아픈 엄마는 고생할 게 뻔함.)

2. 동네 이웃들에게 나눠준다.
(콩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미안함.)

3. 버린다.
(남편이 추천한 방법이었지만, 허리 굽은 큰어머니가 농사지은 걸 어떻게 버리란 말인가!)

4. 다시 큰어머니께 택배로 보내서 콩을 까서 보내달라고 한다.
(이건 남편과 낄낄거리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본 것이다. 진짜 막돼먹은 방법이다.)

5. 딱 30분만 까 본다. 남은 건 나눠준다.

 

내게 너무 많은 콩들 ⓒ 이한나

 
우리 부부는 5번을 선택했기에 어머어마한 양의 콩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콩을 까대기 시작했다.

"까도 까도 줄어드는 거 같지가 않아. 진짜 오늘 안에 다 깔 수 있는 거야? 이런 건 제발 안 보내주면 좋겠다... 버릴 수도 없고... 난 이런 일들이 너무 싫은데... 이거 지역 카페에 올리면 바로 가져갈 거야. 그만하고 그냥 다 줘버릴까? 왜이렇게 졸린지 모르겠네~"

나의 투덜거림은 계속되었다. 남편은 "장모님 좋아하시는데 까서 갖다 드리면 좋잖아. 나는 시골 출신이라 이런 거 잘해. 나 유튜브 보면서 혼자 해도 되니까 징징거리지 말고 가서 자!"라며 정체모를 친절함을 내비쳤다. 그러나 나는 의리 있는 여자였기에 약속대로 30분의 시간을 지키며 콩을 까댔다.

그렇게 3시부터 시작된 콩 까기가 30분 정도 흘렀을까? 쓰레기인 콩껍질은 비닐 한가득 찼고, 제법 까야할 콩의 양도 줄어드는 듯했다. 어차피 엄마 갖다 줄 콩인데... 딱 30분만 더 까 볼까 싶었다.

"오빠~~~ 우리 깔끔하게 딱 4시까지만 까 볼래??

앗... 3시 56분.
 

성공! ⓒ 이한나

 
정확히 4시가 되기도 전에 우리는 콩을 다 까버렸다. 문득 오래전부터 엄마가 자주 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남편에게 나불거려본다.

"여보~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게 누군지 알아? '눈'이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어렸을 때 엄마가 멸치 다듬자, 마늘 같이 까자 할 때마다 난 정말 무서웠어. 엄청 큰 대야에 어마어마한 양이였거든. 언니들은 다 커서 없고 막내인 나만 시키니까 나 엄청 짜증 냈는데~ 이거 언제 다하냐며~ 이 많은 걸 어떻게 하냐며 말이야.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이런 말을 했어. '세상에서 눈이 제일 게으른 거야. 눈으로 보면 언제 다하나,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보이거든. 눈이 그렇게 우릴 속이는 거야!' 그러면서 부지런한 손이 움직이면 금방 할 수 있다고 한 번 같이 해 보자며 매번 멸치 다듬기와 마늘 까기를 시켰어. 물론 하다가 도망 갔지~ 그땐 끝까지 해본 적이 없는데~~ (헤헤)  어릴 때 엄마한테 듣던 눈이 게으르단 말이 실감이 난다~ 콩 다 깠잖아. 대박이지?"


그렇게 나는 알록달록한 콩들을 비닐에 담으며 뿌듯함을 만끽했다.

마흔이 돼서도 엄마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내가 왜 이리 기특한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가 하는 이야기에 자동적으로 가시를 장착해서 들었던 기억이 크다. 짧게 '잔소리'라는 단어로 정의하면서. 그랬던 내가 엄마의 말을 기억하며 콩을 다 깐 것을 자축하고 있다.

문득 엄마 생각이 떠오른다. 나를 낳고서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15일밖에 안된 나를 업고 한 겨울에 일을 하러 나가야 했던 엄마. 감사하게도 그 엄마는 부족함 없이 딸 셋을 당당하게 키웠고, 아버지가 학업에 몰두할 수 있게 모든 것을 책임졌다.

엄마는 '이걸 언제 다해?!', '하기 싫은데'라며 내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내 몸 하나 고생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우리들을 키워왔으니 엄마의 눈은 게으를 틈이 없던 것이다.

부지런한 엄마의 눈을 생각해보니, 여러 엄마들의 눈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단연 내 눈이다. 남들은 늘 나에게 게으름을 지적하지만 나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눈이다. 밖에서 아무리 벨을 눌러도 잠에서 깨지 않는 내 눈은 아이를 챙겨야 하는 순간에는 7시면 번쩍 뜨여진다. 게다가 혼자 있으면 빵 쪼가리 찾고 있을 눈이 가족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 매번 반짝거리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일하러 가는 날에는 시간을 15분 단위로 쪼개  간식부터 식사 준비까지 마치고 머리에 구르프를 만 채 자동차로 달려가는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엄마다. (때때로 쌀국수를 사 먹으라며 돈을 쥐어줄 때도 많지만.) 얼마나 뿌듯한지, 인증샷을 열심히 찍어댔다.
 

아이의 밥상 ⓒ 이한나

 
나뿐이랴! 세상에 존재하는 엄마, 아빠들은 힘이 들 때마다 게으른 눈을 타이르고, 자신의 눈에 가족들을 담아내며 순간순간들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매일 밤 "회사 가기 너무 싫어. 진짜 너무너무 싫어"라는 말을 하며 잠들기를 싫어하는 남편 역시 억지로 자신의 눈을 감기며 내일을 위해 살아가야 할 자신을 도닥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오늘은 콩을 깐 것과 더불어 말괄량이였던 내가 '엄마'로 '아내'로 나름 부지런한 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칭찬하고 싶다. 딸만 생각하면 늘 미안했던 마음을 이 순간만큼은 내려놓고 외쳐본다.

"나는 1등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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