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5 07:20최종 업데이트 21.10.25 08:28
  • 본문듣기
기억해보라. 트럼프가 얼마나 많은 실언과 망언을 일삼았는지. 성 추문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의혹에 휩싸였는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얼마나 많은 미국 언론이 당황했는지. 진보주의자들은 그를 '수구 꼴통' '도덕 파탄자'로 깎아내렸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국익 우선주의자' '자국민 보호주의자'로 치켜세웠다.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였다. 실용 앞에 도덕과 정의는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었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합리와 이성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역사는 길게 보면 진보한다지만, 끊어서 보면 진보와 퇴보를 되풀이하며 갈지자걸음을 한다. 세상은 진보의 것도 아니고 보수의 것도 아니다. 그냥 세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의 진보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바친 피와 땀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까. 


그런데 진보는 반드시 이성적이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걸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진보가 이성과 행복을 수반한다는 믿음은 불안하다. 물질적 진보와 정신적 진보는 각자의 길을 걸을 뿐이다. 운 좋으면 가끔 만나겠지만. 

놀랍게도 또는 별일 아니게도, 부유한 나라들이 시장가격을 조절하려 식량을 폐기하고 생산량을 줄일 때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먹을 게 모자라 수많은 아이가 죽어 나간다. <인구론>을 쓴 토머스 맬서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여전히 '신의 섭리'를 주장할까? 흑사병을 하나님이 내린 재앙 또는 은혜라고 설교한 파눌루 신부(알베르 카뮈 <페스트>)는 우주관광을 하는 첨단과학 시대에 창궐한 코로나19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까? 

놀랍게도 또는 별일 아니게도, 진보의 상징인 '5.18 정신'을 입에 올리면서 그 원흉인 전두환을 미화한다. 독재는 했지만 인재를 잘 부려 물질적 진보를 이뤘다는 이유로 말이다. 계엄군 총에 숨져 불태워진 '소년'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소설가 한강이 피를 토하면서 불러낸 그 어린 영혼 말이다(<소년이 온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경선 후보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청년정책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후보는 "전두환 옹호 발언과 관련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5.18 망언'과 진보적 가치

야권 유력 대선주자 윤석열의 '5.18 망언'과 5공 미화는 새삼 진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산업화가 물질적 진보라면 민주화는 정신적 진보다. 민주화에 이바지한 고귀한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사람이 꽤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지자들은 개의치 않는 듯싶다. 대선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적인 실언 행진에도 좀처럼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는 점만 봐도 그렇다. 

냉정하게 보자면 민주당은 진보가 아니다. 진보적 보수, 또는 좌파적 보수다. 우파적·수구적 보수로 분류되던 국민의힘은 이준석이 선장이 된 후 개혁적 보수로 거듭나려 그 나름 애쓴다. 정략적이든 실용적이든, 진보적 가치를 존중하려는 태도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5.18 망언'에 이 당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부산을 떤 것은 공든 탑이 무너질까 봐서다. 

윤석열을 맹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재인과 민주당이 미운 나머지 진보적 가치에 염증을 느낀 듯싶다. 물질적 진보가 중요하지, 정신적 진보는 운동권의 좌파 놀음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무능한 문재인 정권을 단죄하고 응징하고 싶어 한다. 진보를 내세우는 자들의 이중성과 부도덕성에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비슷한 결함은 외면한다. 지지 후보의 약점에 대한 반대쪽의 거센 공격은 외려 그들을 똘똘 뭉치게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윤석열의 대체재로 꼽히는 홍준표의 말대로, '보수 궤멸'에 앞장섰던 사람이 보수의 열렬한 지지를 받다니...  

일부 강성 지지자들에게서는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구속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는 살의가 느껴진다. 국정농단 특검이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에 연루된 데 이어 화천대유 '50억 클럽'에도 포함됐으니 분노할 만도 하다. 이들은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으로 여긴다. 복수심과 증오심이 앞서다 보니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선주자가 특검 수사팀장과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그 비극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기억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다. 

대신 그들은 '윤석열 검찰'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공소장에서 '대통령'을 30여 회 언급한 것에 기대를 건다. 그 공소장에 사실과 증거보다 주장과 추론이 넘친다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정권 바뀌면 윤석열 라인의 정의로운 검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혼내줄 텐데. 

윤석열 지지자들

윤석열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권의 정책과 사람 다 싫다. 대표작인 검찰개혁은 정권 수사 차단용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에게 조국과 그 추종자들은 '내로남불'의 화신이고, 조국 수사를 지휘한 윤석열은 정의와 공정의 화신이다. 윤미향은 '반일'을 상품화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를 빨아먹은 위선자다. 진보적 시민운동가들 중에는 윤미향 부류가 쌔고 쌨다고 여긴다. 장하성, 김수현, 김현미는 실력 없고 무책임한 공직자의 전형이다. 선의라고 해서 실정을 용납할 수는 없다는 거다. 국정은 실험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들은 알까?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걸까? 윤석열이 지휘한 적폐청산 수사 때 무리한 기소로 법정에서 깨진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1심 판결 무죄율(15.8%)이 일반 형사사건 무죄율(3.1%)의 5배를 웃돈다는 사실을(<문화일보> 2020.10.7). 입이 아파 더 말하기도 싫지만, 조국 수사에 얼마나 억지스러운 면이 많았는지를. 하긴 홍준표의 '조국 과잉수사' 발언을 성토한 걸 보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또 아는가? 언론에서 윤미향에 대해 제기한 갖가지 의혹 중 기부금 유용(딸 유학자금), 공금으로 개인 부동산 구입, 안성쉼터 헐값 매각, 부친 특혜 고용(쉼터 관리인), 남편회사 일감 몰아주기 등 파렴치한 혐의는 대부분 죄가 안 돼 공소장에 오르지도 못했음을. 이런 말 한다고, '그럼 조국, 윤미향에게 잘못이 없다는 거냐? 비리를 감싸는 거냐? 혹시 조국이나 윤미향을 좋아하는 거냐'라고 따지면 난감하다. 추미애 아들의 '병가 특혜' 소동에서 질리도록 봤듯이 언론은 표적을 고르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마구 내지르고 본다. '아니면 말고'다. 언론의 표적 취재는 검찰의 표적 수사와 닮았다. 그래서 두 집단이 자주 동맹을 맺는지 모르겠다. 

민주당 지지자에서 비판자로 돌아선 사람들이나 오락가락 중도층은 '5.18 망언'에 갈등할 수도 있겠다. 4년 전 대선 때 국정농단에 분개해 민주당 후보를 찍었던 이들은 '촛불정부'에 실망해 본의 아니게 반민주당 세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들의 정체성은 실용주의에 가깝다. 그래도 도덕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아파트값 폭등과 전세대란, 세금폭탄에 분노하지만, 무고한 양민 학살에 저항한 5.18정신을 폄훼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윤석열의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다. 
 

전두환 옹호 발언을 한 윤석열 국민의힘 예비후보의 발언을 규탄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윤석열 캠프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 19일 부산 해운대구 당협 사무실을 방문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 했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다. 호남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는 발언을 했다. ⓒ 권우성

 
선택적 분노는 정당한가

다 좋다. 정권 비판에 일리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잘한 일이 왜 없겠느냐마는 논외로 치자. 그런데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른바 선택적 분노, 또는 차별적 분노 말이다.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 사람 사는 세상에는 상식이란 게 있다. 전두환·노태우가 수천억 원씩 받은 것과 진보 지도자들의 '소액 비리'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당락을 좌우한 특혜적 입학 비리보다 관행적 스펙 비리에 더 분노하는 건 어색하지 않나? 아파트값 올랐다고 좋아하면서 세금 더 낸다고 정권에 화내는 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남의 잘못은 칼같이 단죄하면서 본인과 처가와 검사들 비리 의혹에는 한없이 관대한 이중성이 불편하지 않다면 이상한 일 아닌가? 

세상은 진보와 보수라는 두 바퀴로 굴러간다. 진보도 필요하고 보수도 필요하다. 서로 경쟁하고 비판하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5.18 망언'은 입만 열면 정의와 공정, 법과 상식을 외치는 사람의 정체성과 본심을 의심케 한다. 그 당 대표 이준석이 말한 대로 전두환 시대에는 정치가 없었다. 통치만 있었다. 강력한 사회정의를 내세우면서 자신은 천문학적인 뇌물을 챙기고 부하들도 단단히 한몫 잡았다. 많은 사람이 피눈물 흘린 시대의 독재자를 미화한 것은 상식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다. 

투표로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심판하겠다는 건 정치적 선택이니 존중해줘야 한다. 다만 분노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건 이성적이지 않다. 증오의 정치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그럼에도 민심이 원한다면 어쩌랴? 전두환도 해먹고 트럼프도 됐는데. 내 주변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을 유일하게 맞혔던 군사 전문기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꼭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북한군 침투설에 일리가 있다면서.

바야흐로 진보의 수난시대다. 보수와 진보가, 또는 물질적 진보와 정신적 진보가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는 건 과욕일까? 어쩌면 그런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지 모른다. '멋진 신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그래도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는 말자.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체 게바라의 말이 나 같은 속물에게 여전히 영감을 주는 이유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7,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