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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패럴림픽서 둥둥 울린 북,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김성호의 씨네만세 341] <울림의 탄생>

21.10.23 10:05최종업데이트21.10.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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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울림의 탄생> 포스터 ⓒ 씨네소파

 
장인은 북에 반했던 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그 정을 일찍 떼야 했던 설움과, 수십 년이 흘러도 복받치는 슬픔을 무심코 두드린 북소리가 달래준 한 순간을 말이다.

때로 어느 영화는 단 한순간을 위해 만들어지곤 한다. 다리를 저는 9살 소년 임선빈은 부모에 의해 근로재건대에 보내졌다. 전후 복구에 한창이던 1950년대 말, 어딜 가나 널려 있던 노숙자들을 지방자치단체에 등록시키고 폐품을 줍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게 근로재건대였다. 사실상 넝마주이였으나 배를 곯지는 않았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배나 곯지 않게 하자고 버린 것이다. 그 시절 한국엔 그런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2년이나 버텼을까. 선빈은 근로재건대를 뛰쳐나와 도망친다.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소아마비를 앓고 몸이 약하던 그를 주변에선 너무나도 많이 때렸다. 그 과정에서 오른쪽 귀를 맞고 한쪽 청력까지 거의 잃어버린다.

선빈이 북과 만난 건 우연이었다. 도망친 그의 앞에 우연히 한 신사가 나타난다. 그는 선빈의 눈을 가만히 보더니 그에게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일이 좀 고되긴 해도 밥을 굶지는 않는다고, 학교도 보내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집도 절도 없는 열한 살짜리 소년에겐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선빈은 그렇게 북에 닿았다.
 

<울림의 탄생> 스틸컷 ⓒ 씨네소파

 
악기장이 된 소년의 꿈

영화는 악기장이 된 선빈이 대북을 만드는 과정을 따른다. 북을 만든 지 반백년이 흘렀다. 스승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기술이 선빈에게 흘러들어 세상과 만난다. 어느덧 선빈은 나라가 공인하는 장인이 되었다. 몸 성히 자란 아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북을 만드는 건 고단한 일이다. 전통은 그저 전통으로만 남아 있다. 북이 서는 자리는 크게 줄었다. 찾는 이가 적으니 팔리는 북도 얼마 없다. 그마저도 소리보단 값을 따지는 게 태반이다. 값싼 북만 팔려나가니 장인의 혼 같은 말도 민망할 뿐이다.

그러나 장인에겐 꿈이 있다. 23년 전 조수로 88서울올림픽 대북 제작에 참여해보았던 그는 죽기 전 꼭 한 번 대북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담은 커다란 북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 소리를 내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23년 전 나무장수에게 좋은 나무를 따로 사 말려둔 것도 그런 기대 때문이다. 좋은 북은 두 번의 장마를 겪고 볕 좋은 곳에서 말린 나무로 만든다. 대북이 될 만한 그런 나무가 선빈의 창고에 잠들어 있다.

영화가 담은 건 선빈의 꿈이 이뤄지는 과정이다. 2018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동계올림픽에 이어 열린 패럴림픽 개막식에선 선빈이 만든 대북이 울릴 예정이다. 기회가 왔고 선빈이 준비한 나무도 마당에 늘어섰다. 소 한 마리 가죽을 잡아 늘려 대북 위에 올린다. 목과 등허리, 엉덩이, 양쪽 뱃가죽이 내는 소리가 조금씩 다르다. 그 부분 부분을 얼마나 잡아늘일지 결정하는 건 장인의 몫이다.
 

<울림의 탄생> 스틸컷 ⓒ 씨네소파

 
하나의 소리를 좇은 장인의 평생

선빈은 하나의 소리를 찾아 평생을 북을 만들었다. 그의 평생이 그 소리 하나를 좇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소리가 무엇인가. 카메라 앞에 앉아 인터뷰하던 선빈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든 장인이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게 한 기억 속 소리다. 어릴 적 북공방에서 두드린 가죽에서 울려 퍼진 소리다. 엄마를 만나고픈 그리움과 버려져 고생했던 한과 그 서글픔을 달래는 한 음이 우러나와 선빈의 마음과 마주 닿았다. 그 소리로부터 선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불편한 다리와 멀어가는 청력에도 소리를 찾고야 말겠다는 장인의 각오가 서슬 퍼렇게 벼려져 있다. 대북에 올라 망치질 하는 장인과 투닥거리며 그의 조수노릇을 하는 아들의 손에서 대북이 탄생한다. 그 대북이 평창패럴림픽의 시작을 알린다.

영화는 마냥 즐겁지 않다. 북과 전통음악과 전통악기가 처한 버거운 현실이 영화 내내 관객을 압박한다. 평창 패럴림픽 조직위원회는 구두 약속에도 불구하고 팸플릿에 북과 임선빈 장인에 대한 문구 한 줄을 넣지 않았다. 북이 두드려지는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리는 장인과 그 아들의 뒷모습은 도리어 씁쓸하고 황량하다.

<울림의 탄생>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킨다. 장인이 어릴 적 들은 소리처럼 말로 잡아다 내보이기 어려운 무엇이 영화의 끝에서 남겨질 뿐이다.

영화는 이정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로 명성을 얻은 진모영 감독의 조감독으로 다큐멘터리를 배웠다. 그에게도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인이 소리를 좇듯, 저만의 무엇을 끝없이 좇아야 할 운명을 받은 것일까. 영화는 소리를 좇는 장인과 그를 담아냄으로써 제가 좇을 것에 한 걸음 다가서려는 또 다른 누구의 이야기다. 때로는 즐겁지만 가끔은 서글프고 자주 고될 그 길을 기꺼이 걸으려는 그들에게 전할 것이 고작 작은 박수뿐이라는 게 민망할 뿐이다.
 

<울림의 탄생> 스틸컷 ⓒ 씨네소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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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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