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불타고, 동네 사람들은 총살... 곤을동의 비극

이야기의 미학, 제주올레 18코스(19.8km) 제주원도심에서 조처 올레까지-두 번째 이야기

등록 2021.12.03 10:51수정 2021.12.0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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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에서 화북천을 건너 화북동 금산마을로 연결된 작은 길이 사진 속에 보인다. 지금 곤을동에는 불타버린 집터와 올레길(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만이 남아 있다. ⓒ 차노휘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
다섯 살 소년이 경찰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다. 소년 뒤로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와 두 살짜리 계집아이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 그러면 살려주마."
소년은 일어섰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어느 사이 오줌을 지렸는지 바짓가랑이가 다 젖어 있었다. 한 발짝을 겨우 떼어 경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담장 너머에서 시퍼렇게 겁에 질린 주민 몇이 훔쳐보고 있었다. 소년이 막 대문을 나서려고 할 때 총소리가 울렸다. 총탄을 등에 맞은 소년이 고꾸라졌다.
  
별도봉을 지나 제주 4·3 당시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 있는, 곤을동에 도착했다. 내내 뭔가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듯했다. 총에 맞아 죽은 소년. 이미 총에 맞아 쓰러진 소년의 어머니와 누이들. 위 이야기는 실화다. 소년의 아버지는 이덕구이다. 당시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산 쪽으로 달아나려는 이덕구의 아들을 경찰이 총으로 사격했다고 진술했다.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난 이덕구(李德九, 1920년~1949년 6월 7일)는 '제주 4·3 항쟁'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어릴 때 일본에서 유학했고 학병으로 관동군에 강제 입대한 적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했다. 48년 7월과 8월 사이에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자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경찰이 이덕구의 항복을 촉구하면서 가족들을 위협한 것이. 항복하지 않자 그의 가족을 거의 몰살시켰다. 일본에서 4·3 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섰던 '재일본 4·3유족회' 회장 강실(이덕구의 생질)은 울음을 삼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8년 12월 26일 삼촌 가족과 친인척 20여 명이 몰살되었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은 12월 20일경이었습니다. 경찰은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 삼촌 가족과 친인척 20여 명을 연행했습니다. 처음에 끌려간 곳은 조천지서이고 곧 읍내 제1구서로 옮겨졌다가 약 일주일만인 48년 12월 26일 별도봉에서 학살당했습니다."

명당 설화가 전해오는 별도봉이 한 가족의 몰살 장소가 되었다. 내내 내 뒤통수를 잡아당겼던 것은 그들의 영령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 속 제주 4․3 항쟁. 곤을동에도 아직 떠나지 못한 혼령들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예전 집터와 돌담, 올레길 사이사이로 잘 정리된 잡초들이 지금은 정원처럼 잘 단장되어 있었다.
 

곤을동 ⓒ 차노휘

 
제주의 마을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시기는 1948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이다. 4․3이 발생하면서 군대와 경찰은 해안지에 주둔하였고, 무장대는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자연스럽게 무장대와 중산간 마을은 왕래가 잦았다. 무장대가 필요한 식량을 대어 주거나, 연락을 맡기도 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거나 안면이 있어서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정부군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해안지대로 내려 보내고 무장대가 은거할 수 없도록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린다는 전략을 세웠다. 명령을 어긴 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처단하기로 했다. 이런 요지로 1948년 10월 17일에 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포고문을 발표한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대로 간주하여,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그 무섭던 소까이(疏開). 온 섬을 뺑 돌아가며 중산간 부락이란 부락은 죄다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을 훤히 밝혀놓던 소까이. 통틀어 이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삼만이 죽었다. 대부분 육지서 들어온 토벌군들의 혈기는 그렇게 철철 넘쳐흘렀다. 특히 서북군은 섬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만큼 혈기방장하였고 군화 뒤축으로 짓뭉개어 이 섬을 지도상에서 아주 없애버릴 만큼 냉혹했다.
―현기영의〈해룡이야기〉《순이삼촌》(실천문학사 刊), p149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에서 자행된 소개(疏開)에서도 살아남은 곤을동은 불타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초토화된 유일한 해안선 마을이다. 무장대라 추정되는 청년이 곤을동에서 사라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주민들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정부군에 잘못 보이면 바로 죽음이었다.
 

곤을동 올레18코스 ⓒ 차노휘

 
시간이 흘러 마을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다. 안곤을은 복원되지 않았다. 하천과 별도봉 사이에 있어서 비가 오면 고립되었다. 다른 마을과 떨어져 있어서 다시 피해를 볼까 두렵기도 했다. 먹는 물이 멀어서 길어다 먹는 불편함도 있었다. 땅을 팔아 버린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떠난 곤을동 마을이 이렇게 서서히 잊혀져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아픈 진실은 영원히 묻히기 싫었는지 올레길 18번 코스로 다시 태어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올레길은 화북포구를 끼고 돌았다. 나는 비릿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나른하게 귓전으로 밀려오던 파도소리가 '멜(멸치) 후리는 소리'를 동반했다. 멸치 후리는 소리는 모래사장이 발달한 바닷가에서 '후리질'로 멸치를 잡으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엉허야 뒤야
엉허야 뒤야
어기여뒤여 방애여
….

   

화북 포구는 조선시대 조천 포구와 더불어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 관에서 처음으로 축조한 포구이다. 수많은 유배자와 관원이 이곳을 거쳐 갔다. ⓒ 차노휘

 

제주도의 만리장성 환해장성. 고려 때 관군이 삼별초를 막기를 위해서 쌓기 시작했다. 삼별초는 진도 진영이 무너지자 마지막 장소로 제주도를 택했다. 이곳에서 1년을 버텼다. ⓒ 차노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제주올레 #제주4.3항쟁 #이덕구 #곤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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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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