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도 정복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마한, 완도

완도 고고학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

등록 2021.12.03 15:08수정 2021.12.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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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해양 세력을 키워냈던 완도의 섬과 바다
우리는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흔적 조개껍데기 무더기인 패총은 완도의 섬 곳곳에서 발견됐고, 소안면 비자리에서도 나왔다. 소안면사무소 옆 소안고등학교 운동장 동쪽에서 발견된 패총과 철기시대 유물인 타날문토기 파편은 마한 지역의 사람들이 이곳에 정주했고 소안군도에도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사시대 이래 역사시대 초기까지 섬은 제도권에서 무척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바다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조개류와 물고기, 해초 등 바다생물은 인류의 무궁무진한 식량자원이었다. 바다와 자연이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들은 약탈에 의지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한 자급자족의 공간을 형성했다. 

마한 사람들은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했다. 전쟁을 싫어해서 말을 타지 않고 노를 저어 바다를 항해하며 서남해안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했던 것. 인근 지역 해남에서는 지금 마한의 유적발굴이 한창이다. 마한의 마지막 남은 왕국 침미다례에 관한 연구 때문이다. 마한의 남부연맹체로써 침미다례(신미제국)가 군림했다는 사실은 해남에 있는 고분군과 군곡리 패총 외 집터와 무덤 양식의 유물 발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마한의 마지막 왕국 침미다례가 '마한의 남부연맹체로 군림했다'는 언급은 중국 진서에 기록했고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가 백제를 견제하려고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고고학적으로 해남에 있는 거대한 고분군의 형성과 송지면 군곡리 패총 외 다양한 유물 등을 통해서 보고된 내용을 학계는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고 지역의 향토사학계도 한몫 거들었다. 이제 해남은 학계에서 세 군데로 추측한 마한의 마지막 제국 영토 확정의 깃발을 꽂게 된 분위기다. 

완도 지역의 고고학 조사는 섬으로 구성된 지리적 여건상 1960년대 중반 시작했다. 1967년부터 2년 동안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의 남해도서 지역 지표조사가 처음이었다. 이때, 고인돌 군락과 패총 외 선사시대의 토기 등 여러 유물과 유적을 발견했고, 연달아서 학계에서는 완도 지역의 역사유적을 연구했다. 그 결과 소안군도에서 지석묘와 패총 외 유물을 추가로 확인했고, 신지도, 고금도, 여서도, 청산도, 완도 체도에서 선사유적과 고분 등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유적조사만 이루어졌을 뿐 도서 지역의 고대 유적에 대해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 석연치 않다. 유적 관련 조사는 계속해서 이뤄졌지만, 기존에 조사한 유적들에 대한 현황 파악과 검토뿐이었다. 유적들이 대부분 도굴되거나 도서 지역의 개발로 인해 소실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 상당했다. 지면으로 완도 지역 고대 유적조사 결과를 기회 닿는 대로 서술하겠지만, 완도의 고고학 자료가 미비한 점은 무척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완도는 최초의 인류가 정착하며 살았던 선사시대의 흔적이 매우 빠르고 뚜렷하다. 구석기 시대 유물로는 달도를 비롯해 선사의 유적이 신지 고금에 이르고 청산도는 물론이거니와 최남단 여서도까지 전역에 걸쳐 분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국가형성 시기 완도의 역사를 보면 완도읍과 군외면은 백제시대 색금현(塞琴縣)에 속했고, 신라시대 서기 757년 (경덕왕 16)에는 양무군의 탐진현(耽津縣)으로 개편되어 940년 고려조 (태조 23)에 탐진현이 영암군에 편입됨에 따라 완도읍과 군외면은 영암군에 속하게 된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영산강 일대와 전남 서남부권역에 형성된 마한의 유적조사와 침미다례의 영역은 완도의 섬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 당시의 지역 구분을 참고하면 고고학 연구는 현재의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연구가 이뤄져서는 안 될 일이다. 

완도의 부속된 섬 지역의 막강한 해양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고, 마한 사람들은 육지보다는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 영역을 펼친 것으로 보면 서남해안에 부속된 섬들은 모두 마한의 영역이었다. 이 점에서 지역 사람들의 역사적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한 지역의 역사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체성을 찾는 정신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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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안목, 식민사관론 탈피해야

요즘 들어 "한반도를 조선 대륙으로 불러야 한다"라고 주장을 펼치는 사상가를 보았다. 우리나라를 반도의 영역에 국한 시킨 것은 일제의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는 것. 여기에서 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말한다. 그래서 그 사상가들은 지도를 뒤집어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바다를 무대로 활동 영역을 펼친 세력은 대양을 향해 나아갔던 이유 때문인데, 바로 마한 사람들은 바다로 꿈을 펼치려는 연맹체였다.

고대국가 마한을 연구하면서 영산강 일대의 장고 무덤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가 있었고, 여전히 활발하다. 영산강 일대에 형성된 해양 세력을 마한의 영역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동안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나오는 내용이 거의 확정적으로 일치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일대가 주 무대였던 마한의 영역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까지 동아시아 물류의 거점지대 역할을 다했다.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중요한 해양 세력의 거점이었기에 청해진 장보고의 해양 세력이 대양을 향해 꿈을 키운 것도 당연한 절차였다. 막강한 해양 세력의 바탕이 선사시대부터 완도바다 곳곳에 이미 형성돼 왔던 것. 

1500년 전 마한 사람들은 바다를 보며 큰 꿈을 키웠다. 바다는 막힘이 없다. 흐르고 흘러서 빛으로 남는다. 바다는 마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나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청해진 장보고의 해양 세력을 형성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당과의 교역을 통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을 아우르는 막강한 힘을, 완도의 섬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키워내고 있었다. 그 바다 앞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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