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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좀 한다 하면 '의치한약'... 가슴을 친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성적순으로 꿈이 획일화되는 한국 교육의 현실

등록 2022.01.02 19:58수정 2022.01.0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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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급하게 일반화시킬 수 없는 조악한 통계라는 걸 전제한다. 고작 고1 아이들 200여 명의 진로희망을 각자의 내신성적과 어림짐작으로 동기화한 것을 두고 통계라는 말을 붙이는 게 적잖이 민망하다.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냐'면서 심드렁해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학년말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기 위해 아이들의 진로희망을 슬쩍 엿봤다. 그들이 원하는 진로가 무엇인지 알면, 교사로서 개별적인 행동 특성과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 등을 기재하는 데에 나름 도움이 된다. 적어낸 진로희망과 아이들의 얼굴이 포개지면서, 수업과 일상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곤 한다. 

예외가 없다, 의치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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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학생들의 진로희망 기재내용을 봤다. 똑같더라. ⓒ pixabay

 
최상위권 아이들의 진로희망은 거의 예외 없이 '의사'다. '한의사'나 '약사'까지 포함하면 상위 10~20% 정도는 된다. 대학 입시에 가까워질수록 현실적인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게 되면서 시나브로 희망 비율이 줄어들겠지만, 일단 고1 때는 스스로 공부깨나 한다 싶으면 무조건 '의치한약'을 꿈꾼다. 알다시피, '의치한약'이란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SKY를 나와도 백수 신세 못 면한다."

영악한 요즘 아이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이야기다. 혹자가 말하는 '지잡대'보다야 백 배 천 배 낫겠지만, 대학의 간판만으로 취업을 보장받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명문대 합격 소식에 반짝 기뻐할 뿐,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준비하는 이른바 '포스트 고3 시절'에 돌입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취업 전쟁의 공포'는 어느덧 고1 아이들의 어깨조차 짓누르기 시작했다. 대학과 학과 선택의 기준은 단연 취업률. 그렇다고 동급 최고 취업률을 홍보하는 전문대들의 학생 모집 광고에 눈길을 주진 않는다. 일부 되바라진 아이들은 전문대를 두고 '3D 업종 종사자 양성 기관'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결국 졸업 후 취업 걱정이 없는 전문직이 최선이라는 게 진로 선택의 불문율이 됐다. 만연한 '취업 전쟁의 공포' 속에 개인적인 흥미와 적성, 특기 등이 개입될 여지는, 단언컨대 없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의치한약' 진학을 목표로 삼은 기형적인 모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게 기뻐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와중에 학벌 구조가 해체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얼마 전, 올해 서울대 수시 합격자 중 무려 151명이나 등록하지 않았다는 뉴스가 떴다. 복수의 대학에 합격했을 그들의 최종 선택지는 물어보나 마나 '의치한약'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서울대라는 무소불위의 간판도 비록 '지잡대'일지언정 '의치한약' 앞에서라면 더는 행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모두가 의사와 약사를 꿈꾸는 현실에서, 과거 대세의 한 축이었던 판·검사도 설 자리를 잃었다. 예전엔 의사만큼 흔한 꿈이었는데, 요즘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설마 싶어 부러 세어봤더니 200여 명 중 3명뿐이었다. 그나마 한 명은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뒤 정치에 입문할 계획이라고 적어놨다.

그 세 명 모두 최상위권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수에서 의사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굳이 아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의사가 판·검사보다 상대적으로 취업의 문이 넓고 소득이 높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직업의 윤리와 공공성 운운하는 건 '공자왈 맹자왈'일 뿐이다. 

'공무원'으로 수렴되는 진로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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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되겠다는 아이들. ⓒ 오마이뉴스

 
그들에게 조금 못 미치는 상위권에서는 교사가 여전히 인기였다. 그들 대부분은 어릴 적부터 교사를 꿈꿔왔다고 적었다. 다만, 그들 중에 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생 수가 급감해 교사의 수요가 줄어 임용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교사가 되겠다는 어릴 적 순수한 꿈도 취업률 앞에서는 허망한 신기루다. 초등 교사의 임용시험 경쟁률이 2:1이 채 안 되던 호시절의 교대는 웬만한 의치대 뺨치는 내신성적과 등급을 요구했다. 사실상 취업이 보장되는 조건 앞에서 교사로서의 적성과 자질을 성찰해보는 건 사치였다. 대입 합격선을 들먹이며 교대가 사범대를 얕잡아보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주춤해졌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고대 위에 교대'라며 기세등등하던 교대의 합격선이 한풀 꺾인 모양새다. 임용시험 경쟁률이 가파르게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수요가 많다는 서울에서조차 2022학년도 임용시험 경쟁률이 4:1에 육박하고 있다. 학비가 저렴하다는 '당근'만으로는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한편, 성적이 중위권인 아이들의 진로희망은 대개 공무원으로 수렴됐다. 경찰과 소방관, 사회복지사 등이 뒤를 이었다. 심지어 구청의 행정직 공무원이라고 상세히 적은 아이도 있었다. 그냥 공무원이라고만 적은 아이들을 불러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십중팔구 '무슨 일이 됐든 공무원만 되면 좋겠다'고 답한다.

그들에게 공무원은 직업이라기보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항구적인 피난처인 걸까. 국민의 공복이라는 직업윤리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다. 발을 한 번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그들 역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복지부동의 관료주의는 더욱 강화된다. 

공무원 시험을 '인생의 로또'로 여기는 요즘, 고1인데도 수능을 포기한 아이들이 더러 있다. 대입 대신 학력 제한이 없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신성적을 관리하고 수능을 대비하는 노력 정도면 너끈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대학은 일단 공무원이 되고 난 뒤 진학하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에 가까운 하위권 아이들은 뭐라고 적었을까. 몇몇은 프로 게이머나 유튜버 등 일상 속 친숙한 일을 무심코 옮겨놓거나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보였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진로희망이라는 말은 조금 허무해 보이는 측면도 있다.

그나마 뭐라도 적은 경우는 낫다. 태반은 빈칸이거나 '잘 모르겠다' '없다'고 낙서하듯 적었다. 그들이라고 하고 싶은 일과 원하는 직업이 왜 없을까마는, 그들의 성적으로는 꿈에 가닿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포기한 것이다. 청년 세대까지 갈 것도 없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체념은 이미 고1 때부터 시작됐다. 

성적과 자존감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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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 pexels

 
고1 아이들의 진로희망을 들여다보며, 교사로서 새삼 가슴을 치며 성찰하게 된다. 아이들의 꿈이 성적순으로 획일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나아가 취업률과 소득이 진로 설정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현실 앞에 학교 교육의 존재 이유를 자문하게 된다. 학년 초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개별적인 흥미도 적성검사와 진로탐색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다.

섣부른 결론일지는 모르지만, 성적이 학벌과 선망 직업, 취업률, 소득과 정비례하고 있다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정작 주목해야 할 지점은 아이들의 성적과 자존감간의 관계다. 성적이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내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성적이야 얼마든지 들쭉날쭉 할 수 있지만, 성적으로 인해 상처받은 자존감은 회복이 쉽지 않다. 

꿈이 획일화되고 성적과 등치시키는 우리 교육이 위험하다. '취업 전쟁의 공포'가 대학을 넘어 고등학교 교육마저 휘감은 현실을 서둘러 타개해야만 한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듯 모두가 의사와 약사와 교사와 공무원을 꿈꾸고, 나머지 다수는 '이생망'을 외치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자존감은 나날이 낮아지고 있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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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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