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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의 문제'도 잘못된 능력주의와 맞닿아 있다

수학 못한다는 이유로 열등생으로 몰아가는 것은 참교육일 수 없다

등록 2022.02.08 06:05수정 2022.02.0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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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것으로, 이 교수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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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은 능력주의의 강한 영향 하에 있고, '수포자의 양산'은 이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 연합뉴스

 
내가 학생 때는 그런 말 듣지 못했는데, 요즈음 '수포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수학이 너무 어려워 아예 포기해 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라네요. 언론에서는 우리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수포자가 양산된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는데, 실상 그들은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 선천적으로 수리 개념이 부족해 수학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전에 관한 연구결과를 보면 어떤 유전자변이가 수리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특별한 유전적 요인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원천적으로 수포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입니다.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런 유전적 요인을 갖고 태어난 학생에게 맞춤식 교육을 통해 수포자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지 못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유전적 요인을 갖고 태어난 사람의 숫자가 적지 않은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수포자는 반드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맞춤식 교육이라 할지라고 나름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는 현재의 교육이 능력주의의 강한 영향 하에 있고, 바로 이 사실이 '수포자의 양산'이라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듯, 수학은 핵심적인 학습능력으로 인식되어 모든 입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말 같지만, 수학을 잘하는 것이 정말 그렇도록 중요한 일입니까?

물론 이공계열로 진학하려는 학생에게는 수학을 잘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 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할 때 수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연립방정식, 인수분해, 삼각함수 등 어려운 수학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만, 사회 나가서 그때의 학습경험이 도움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는 수학문제 잘 푸는 사람을 능력자로 인정해 후한 보상을 해준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수포자들이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이와 같은 시스템은 유전적 요인으로 수리 개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학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커리어를 선택할 학생에게는 문제 풀이가 아닌 기본개념 위주로 교육을 한다면 수포자가 양산될 리 없을 텐데요(더군다나 요즈음은 컴퓨터가 미분방정식도 풀어주는 세상인데, 고등학교 수학문제 잘 푸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 일입니까?).

수리 개념이 부족하다 해서 모든 측면에서 학습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학이나 체육, 예술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학생도 있을 겁니다. 이런 장점을 최대한 살려주는 것이 참교육이지, 단지 수학을 못한다는 이유로 열등생으로 몰아가는 것이 참교육일 수 없습니다.

단지 수학문제를 잘 못 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등한 학습능력의 소유자로 낙인 찍는 우리 교육의 잘못된 능력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능력주의를 바로잡는 것만이 수포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자의적인 잣대로 능력을 정의하고 이에 맞춰 학생들을 일렬로 세우는 맹목적인 능력주의가 수많은 학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좀먹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비단 교육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이와 비슷한 능력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능력주의 #수포자 #수학 #이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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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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