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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특별한 4.3 판결문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지만"

"피고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직권 재심으로 피해 수형인 40명 명예회복

등록 2022.03.29 17:40수정 2022.03.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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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수형인에 대한 직권 재심 첫 공판이 진행된 29일 오전 4·3 희생자 유족들이 법정 안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다시 봄이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기에 꽃피는 봄에도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하지만, 해마다 보는 사람은 같지 않다)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말처럼 삶이 아무리 험해도 살아있는 한 살기 마련이다. 그만큼 삶이 소중함에도 피고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 희생되었고 목숨마저 빼앗겼다.

29일 오전, 제주지방법원에서 온 판결문은 특별했다. 

"피고인들은 각 무죄" 한 줄짜리 주문과 판단 이유에 그치지 않고, '덧붙여'라는 추가 목차 위 메시지를 담은 문장들이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지법 관계자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안이다보니 덧붙여 말씀하신 것 같다"고 했다.

제주지법 4.3재심전담재판부(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이날 검찰 '직권 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재심 대상자 전원 40명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재판 마무리께 준비한 글을 낭독했다.

판사가 망자 대신 전한 말

장 부장판사가 인용한 글 속엔 제주 4.3 사건의 고통이 축약돼 있었다. 4.3 사건을 연구하고 기록해 온 시인의 책이나, 공권력의 폭압을 지나온 제주도민들의 사투리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 수 있다)"가 판결문 곳곳에 인용됐다. 4.3사건의 아픔을 기록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도 장 판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장 판사는 동시에 피고인이자, 피해자인 망자들을 대신해 전했다. 그는 "피고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한다"고 입을 뗀 뒤 "당신은 설워(서러워)할 봄이라도 있지만..."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제주 출생 시인인 허영선 4.3연구소장의 책 제목(<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지만>)을 따온 것이다.

방청석에선 재판을 지켜보던 유족들의 울음과 함께 4.3 유족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박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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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수형인에 대한 직권 재심 첫 공판이 진행된 29일 오전 4·3 희생자 유족들로 가득찬 제주지법 201호 법정 안에 긴장감이 가득 돌고 있다. ⓒ 연합뉴스


이날 무죄 선고를 받은 40명의 피고인들은 1948년과 1949년,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은 4.3사건 군법회의 판결을 통해 내란죄 및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수감된 피해자들이다. 수형인 명부에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자료 조사를 거쳐 인적사항이 특정된 대상으로,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여전히 수천 명에 달한다. 재판부가 이날 밝힌 당시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총 2530명이 당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심청구자 가운데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피해자도 있었다. 화를 피하지 못하고 경찰에 연행,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징역15년을 받은 인물이다. 인천형무소에서 복역했다는 흔적을 끝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피고인들이 군법회의에서 선고받은 범죄 사실과 같은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하고, 검사는 공소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가 없어 무죄를 구형했다"면서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판은 4.3사건 특별법 개정으로 검찰의 군법회의 대상 피해자들에 대한 직권 재심 청구가 가능해지면서, 재심 개시가 확정되어 나온 결론이다. 오임종 4.3유족회장은 같은 날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사법부가 특별 재심으로 국가 공권력의 책임을 인정한 역사적인 날"이라면서 "이제 아픔을 치유하는 시작이다. 아직 재판부가 특정하지 못한 후손 없는 분들이 많기에 (앞으로도) 명예를 잘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4.3사건 #제주 #재심 #공권력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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