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돌의 시간'을 생각하다

등록 2022.03.30 16:19수정 2022.03.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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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년이 너무 길다. 오 년을 어찌 사나. 까마득한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대선 이후로 나의 시간은 정체되어 있다. 계절 바뀌는 일에도 무감각하다가, 집 안의 작은 영산홍 화분이 피고서야 봄인 줄 알았다. 화분을 창가의 돌 옆자리에 옮겨 놓았다. 여리여리한 연분홍 꽃잎과 산 모양의 화강암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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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꽃잎과 산 모양의 화강암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 신수현

 
어느 해 겨울, 나는 설악산 아래 작은 마을을 혼자 여행하고 있었다.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칼날처럼 매서워도, 하늘은 가을처럼 푸르른 오후였다. 인적이 드문 길을 찾다가 제법 긴 교량을 건너게 되었을 때, 뜻밖의 장관에 압도되어 걸음을 멈췄다.

다리 아래로 허연빛을 강하게 반사하는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데까지 펼쳐져 있었다. 오랜 풍화로 부서진 거대한 공룡의 뼈가 인광을 뿜어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겨울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낸 하천이 빚은 풍광이었다.

그때까지 하천의 바닥은 고운 흙과 미끄러운 수초로 되어있는 줄로만 여겼더랬다. 나는 모양이 제각각인 돌과 돌을 디디며, 한때 물이 흘렀을 길을 걸었다. 태초부터 이어진 돌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다 산을 닮은 돌 하나를 발견했다. 청회색 덩어리에 흰 줄이 켜켜이 박힌 화강암이었다. 내 양 손바닥을 합친 크기인데 무게도 두 손을 써야 할 만큼 묵직했다. 돌이 무슨 말이라도 걸어올 것 같아서 품에 안다시피 들고 왔다.

우리 집으로 옮겨온 돌은 인광을 내지 않았다. 말을 하는 일도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15년째 집 어딘가에 있다. 때론 책장 한 칸을 독차지하고, 열대어 수조 옆에 머물기도 하다가, 요즘은 거실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고 바람이 닿는 곳이다.

나는 화사한 꽃을 짝꿍으로 삼아준 김에 오랜만에 돌의 먼지를 닦았다. 돌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긴 해도 날카롭진 않다. 6부 높이에는 흰 지층이 굵은 띠처럼 빙 둘러져 있는데, 사선으로 박힌 다른 줄과는 반대 방향이다. 수직과 수평이 엇갈린 흔적. 지층이 뒤섞이는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천만 년 전, 오천만 년 전, 어쩌면 일억 년 전쯤에. 영겁 같은 돌의 시간이 섬광처럼 스친다.

이 땅에서 인간이 함께한 지는 오천 년. 거대 암반은 벼락에 몸뚱이가 쪼개져 계곡을 굴렀다. 범람하는 물살에 떠밀려 모퉁이마다 깎여 나갔다. 수백 년 뿌리내린 위대한 나무들이 불에 타고, 인간의 피로 강이 물들었다.

그 피가 다시 허옇게 마를 때까지 돌은 구르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자리를 지켰다. 독수리와 물새가 날아와 앉고, 사슴과 곰의 디딤돌이 되고, 물고기 떼의 은신처가 되고, 인간의 발장난 상대가 되었다. 돌은 조금씩 작아지고 둥글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돌의 능선을 손끝으로 따라가 본다. 햇빛과 바람과 비가 만든 시간의 역사가 뭉클하다. 이 돌은 앞으로도 풍화를 계속할 것이다. 더 조그맣고 부드러운 모래알이 되었다가 세상의 근원인 원소가 될 것이다. 다시 우주만큼의 시간을 겪더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는 돌의 말을 비로소 듣는다. 고작 5년이더냐. 세상이 그렇게 끝난다더냐. 멎어 있던 마음의 시계가 한 칸 움직인다.

오 년을 열 번, 스무 번, 그 이상 이어갈 세상을 생각하며 마음을 잡는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겠다. 그때쯤 내 육신은 태초의 원소로 환원되겠지만. 어느 자리에서든 부끄럽지 않도록. 역사의 힘을 믿으며. 돌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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