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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생 양띠 할머니들이 이러고 놉니다

강사도, 수강생도 동기동창인 흔치 않은 미술 강의... 배우고 시도 때도 없이 익히는 즐거움

등록 2022.04.10 11:14수정 2022.04.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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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크론 바이러스가 한창인 3월 하순, 60대 후반 여고 동기 동창 30여 명이 모교에 모였다. 격주로 열리는 미술 이야기 모임 두 번째 시간이다. 장소는 동창회가 있는 건물의 지하 카페. 강사도 동기동창인데 서양 미술 전문가다. 친구에게 맞춤형 고급 강의를 듣는 행운을 누리다니, 흔치 않은 시츄에이션!


2주 전 화요일엔 파리의 거리 미술품을 슬라이드로 보며 강사를 따라 파리 시내를 2시간이나 쏘다녔다. 2년 넘게 나라 바깥을 나갈 수 없는 비상상황이라선지, 그림의 떡이 된 파리를 그렇게 만났다.

존댓말과 편한 말을 섞어 쓰는 강의가 정답고 유쾌하다. 오늘 주제는 작가 에밀 졸라(1840-1902)와 19세기 프랑스 미술이다. 영국 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등장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예술 양식에 초점이 맞춰진다. 신기계문명의 부상으로 왕실과 귀족이 독점하던 부가 부르조아지에 의해 재분배되는 사회 경제적 변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고체계 자체를 바꿔놓았던 것이란다.

세잔과 졸라를 이야기하면서 19세기 중반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력 이동이란 배경 설명을 곁들이는 강의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위중한 코로나 시국이라, 진짜 재미진 점심 수다 뒤풀이는 생략하기로 한다. 아직 8개나 더 남은 강의가 갈수록 기대된다. 강의료 20만 원이 아깝지 않다.

1955년생 양띠 친구들과 놀며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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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모여서 놀기로, 배우기로 결심했다. ⓒ 정경아

 
코로나 사태 이후 동창회는 2년 넘게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올해 들어 미술이야기 강좌를 조직한 건 열혈 예술 애호가들. 강사를 굳이 밖에서 찾을 필요 없이 우리 동기 내 인재를 발굴하거나 기용하는 게 핵심이다. 시니어 전문 교육기관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과 결이 완전 다르다.

퇴직 전 글로벌 기업에서 일했던 친구가 앞장을 섰고 동창회 지도부가 민첩하게 움직였다. 강좌의 뼈대를 잡은 후 장소 섭외와 수강생 모집 범위 등이 속속 결정됐다. 동기 동창들을 주축으로 가까운 친구들까지 범위에 넣었다. 신이 난 친구들로부터 김밥, 샌드위치 협찬이 쇄도했다.


베이비부머 맏이인 1955년생 양띠가 바로 우리다. 무사히 할머니가 된 후 모여 들어 묻혀질 뻔한 각자의 이름이 서로 불려지는 기쁨을 맛본다. 학창 시절 너나 없이 국영수에 집중했던 영혼들이 이젠 예체능으로 개종한 듯, 미술과 건축과 음악과 춤의 맛에 빠져들었다. 한번뿐인 인생을 너무 좁게 살았다는 억울함과 분함이 이뤄낸 쾌거랄까.

누군가는 크고 작은 병이나 가족관계 갈등을 끼고 산다. 누군가는 황혼육아와 가족 내 간병이란 책임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늙어가는 일밖에 남은 게 없는 건가 싶고, 각자 다른 양상으로 외롭다. 그래서 함께 모여서 놀기로 결심했다.

뭔가를 배우면서 놀기를 더 좋아하는 공통점이 우리를 더 단단히 묶어준다. 마음속에 새로움이 결핍될 때 인간은 늙고 낡아가는 걸까. 배움은 부족해진 새로움을 채워 넣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가만히 친구들을 바라본다. 각자의 생애에 담긴 경험과 지식량의 합은 실로 방대할 것이다. 그뿐인가. 인생의 쓴맛 단맛으로 발효 숙성된 인격과 경륜이 도저한 경지에 이른 눈빛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친구들은 말한다. 우리 나이야말로 자기주도 학습에 최적화된 연령대라고. 뭐든 입맛대로 배우는 게 놀이 중 최고라고. 배우고 시도 때도 없이 익히는 즐거움을 듬뿍 누릴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건 행운이다.

노년은 발전 도상의 여정

배워서 남 주는 기회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 미술사 강좌 다음은 메타버스를 공부해 보자는 의견이 속출한다. 너무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자를 섭외하자는 거다.

우리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은 집단일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그다지 겸손하지도 않다. 인고의 화신이니, 헌신과 희생의 아이콘 따위의 허울 좋은 포장을 벗어던진다. 우리는 노년을 발전 도상의 여정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젊은 친구들에게 배울 것이 많아서 기쁘다. 지식뿐 아니라 영성도 중요 화두가 되어간다.

지구적 생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이웃나라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우리도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아가고 있다. 쌓이는 집단교양과 함께 베이비부머 할머니 세대가 어느덧 집단지성체로서 기능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될 때가 올까? 그건 가 봐야 안다. 친구들과 함께 써내려갈 K 베이비부머 할머니들의 이야기, 엄청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https://brunch.co.kr/@chungkyunga
#베이비부머 #할머니 #집단지성 #자기주도학습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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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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