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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SUV, 경청, 국수... 문 대통령과 세 번의 만남

9일 청와대서 마지막 퇴근... 이제는 '운명의 짐' 내려놓고 평산마을 할아버지로 살아가길

등록 2022.05.10 09:16수정 2022.05.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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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임기 마지막날인 9일 오후 6시 종로구 효자동 청와대 정문을 걸어서 나와 퇴근하고 있다. ⓒ 권우성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마지막 퇴근을 했다. 역대 대통령과 다르게 청와대 분수 주변에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조촐하게나마 퇴임식도 했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그와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취재나 행사를 제외하고 문 대통령과 만났던 것을 꼽아 보니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노무현재단 주차장이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던 당시 문재인 이사장과 잠깐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주차장이라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고, 정치블로거로 활동하며 썼던 글을 잘 읽고 있었다는 덕담 수준의 대화만 나누고 금방 헤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래도 재단 이사장인데 오래된 SUV를 직접 운전하는 것이 신기했다는 기억뿐이었다. 

두 번째는 의원 시절 정치블로거들과 만났던 식사 자리였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문 의원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고,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모임을 갖지만, 실제 자리에서는 듣기보다 자신이 말을 더 많이 한다. 그런데 당시 문 의원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명 남짓한 참석자들이 각자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바람에 뒤에 있던 일정까지 차질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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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제주를 찾은 문재인 의원이 딸에게 다가 가기 위해 몸을 낮추고 말을 건네는 모습 ⓒ 임병도

 
세 번째는 2013년 여름 제주였다. 가족들과 제주를 찾은 당시 문재인 의원과 우연찮게 연락이 돼 집에서 만났다. 


원래는 제주시에서 밥을 사준다고 했지만, 집으로 오시라고 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제주 시내까지 나가서 밥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집에 온 손님이라 아내가 국수를 삶아 같이 먹었다. 문재인 의원이 대선 후보였고, 정치인이라 식사를 대접한 게 아니었다.

당시는 제주로 이주해 제주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시기라 다양한 사람들이 제주만 오면 우리집을 찾아왔다. 누구라도 집에 오면 함께 식사를 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찌개도 끓이고 반찬도 만들어 식사를 대접했지만, 문 의원 가족은 달랑 국수뿐이었다. 

이날도 문재인 의원은 거의 말이 하지 않았다. 아내와 김정숙 여사 둘이서 "계속 뱀을 보니 이제는 무섭지 않다", "욕실에서 지네가 나와 슬리퍼로 잡았다", "잡초가 너무 빨리 자라 풀 뽑는 게 일이다"라는 등의 귀농생활 무용담이 대화의 99%였다. 

문재인 의원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정치블로거인 내가 아니었다. 당시 세 살짜리였던 딸이었다. 문 의원이 작년에 대선 후보로 나왔던 유명한 사람인지 모르는 딸은 낯선 사람을 경계했다.

문 의원은 내내 무표정했던 모습과 달리 가장 환한 미소로 딸에게 말을 건네며 조금씩 다가갔고, 결국 함께 사진찍기에 성공했다. 

2013년 여름에 만났던 문재인 의원과는 정치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음 대선에 나오실 거죠?"라고 물었고, "고민 중이다"라는 말만 듣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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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에 머물 양산 평산마을 사저 ⓒ 임병도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에 당선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정치블로거에서 독립미디어로 활동하다 보니 내가 의도적으로 피했는지도 모른다. 굳이 대통령을 만날 이유도 없었고, 그런 위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재임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항상 힘들어 보였다. 전임 대통령의 탄핵 이후 급작스럽게 전개된 대선과 취임식, 산적한 국내외 문제들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문 대통령과 만났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시골살이를 얘기하고, 아이와 놀았던 순간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 

아마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지워졌던 운명의 짐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퇴임 이후 잊혀진 사람으로 양산 평산마을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 지금 그가 원하는 삶인 듯하다.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우리 아이들이 커서 자식을 낳으면 평산마을에 갈지도 모른다. 전임 대통령이 아닌 어릴 때 우리집에 놀러 온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자고 하면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을이 지는 평산마을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며 환한 미소를 짓는 동네 할아버지로 오랫동안 건강하기를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 #위드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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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언론 '아이엠피터뉴스'를 운영한다. 제주에 거주하며 육지를 오가며 취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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