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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ㆍ평화방송 개설하기까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45] 함세웅은 다부진 추진력을 발휘한다

등록 2022.05.21 12:03수정 2022.05.2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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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창간호는 1988년 5월 15일 발행되었다.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신문으로, 창간 때는 타블로이드 배판으로 12면 발행이었다. ⓒ 지요하

 
함세웅은 지식인보다 지성인을 선호한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행하는 지행일치의 지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토착화시키려면 무엇보다 자유언론의 중요함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껴온 터다. 그 동안 서울교구 주보를 발행하면서 그 효과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100만 신자를 안고 있는 한국천주교(가톨릭)에 제대로 된 신문과 방송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커뮤니티가 모자란다는 반증이었다. 

홍보국 일을 하면서 신문ㆍ방송을 만들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늘 기독교방송국에 가서 인터뷰하고 출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참여하면서. '아, 우리 가톨릭도 이런 선교를 위한 방송매체 언론매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선포하지만, 인권과 민주화, 독재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가 홍보국에서 그 계획을 세웠어요.

홍보국 예산을 제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주보 수익금을 저축해서 얼마가량을 모아놓았고요. 그를 기초로 사무처장 김병도 신부하고 늘 말씀을 나눴습니다. (주석 5)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김 추기경의 재가에 앞서 총 대리인 김옥균 주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교회의 자금을 쓰지 않고 자체적으로 마련할 것임을 밝혀 동의를 받았다. 그 즈음 가톨릭성모병원이 여의도로 옮기면서 이 곳이 비게 되었다.

여러 곡절을 거치며 기금을 모으고 기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날 추기경이 불렀다. 성심여대 학장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반대세력이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의 설립을 저지하고자 추기경을 동원한 것이다. 함세웅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방송국 이사회 구성에서 김 추기경이 이사장을 맡았다가 얼마 후 김옥균 주교에게 넘겼다. 이사회에서 김 주교는 함세웅에게 면박을 주거나 핀잔을 하는 등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다 그는 견디다 못해 전후 사정을 추기경에게 말씀드리고 서면으로도 제출했다.


그래서 제 고민을 김수환 추기경께 말씀드리고 서면으로도 제출했습니다. 이건 사실 개인에 대한 면담이잖아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하고 제가 틀어진 게 그때부터인데… 그 글을 김옥균 주교한테 준 거예요. 김옥균 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 썼는데 상담자 격인 추기경이 그걸 바로 당사자에게 준 겁니다. 김옥균 주교가 저를 만나자고 그러더니 "자네가 쓴 거 추기경한테 받아서 다 읽었네."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어요. (주석 6)

함세웅은 어떤 일의 책임을 맡으면 다부진 추진력을 발휘한다. 갖가지 역경을 버티며 1988년 5월 15일 <평화신문> 창간을 성사하고, 이어서 평화방송의 설립에 나섰다. 그는 두 매체 창간에 사장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평화방송을 만드는 중에 노조가 결성되었어요. 제가 노조 만든 사람들을 불러서 "아직 회사가 채 구성도 안 되었고 지금 모금 중에 있는데 노조부터 만들면 내가 힘들지 않느냐. 지금 내가 나무에 올라가려고 그러는데 너희들이 내 다리를 잡으면 내가 나무에 어떻게 올라가느냐. 지금 김옥균 주교하고도 부딪히고,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여러분들까지 방해가 되면 어떡하느냐. 다 된 다음에 내가 노조하라고 그럴 테니까…"하며 만류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몇 사람이 노조 신고하고 왔대요. 그러니까 여러모로 어렵더라고요. (주석 7)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조합원 4명이 해고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안기부가 좋아하고 교회 안에서도 반대 측이 고소해 하였다. "사장이 노조탄압한다"는 노동자들의 현수막이 걸리고 신문에 함세웅을 비난 기사가 나왔다. 그의 생애를 두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결과론이지만 그가 사측에서 노동자를 해고한 것이다. 그의 삶과는 상치된 사건이다.  

지금 같으면 경험이 있으니까 제가 그 불만들을 다 녹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는 세상을 몰랐고 그저 순수한 열정만 있었으니 노조가 안 된다고만 생각한 거죠. 노조 사람들과 대화를 제대로 못했어요. 위의 간부들은 제가 직접 나서면 안 된다고 하니 나설 수가 없고. 실무자 신부는 기자들하고 싸우고… 그게 저한테 큰 아픔이고 부끄러움이예요. (주석 8)


주석
5>  앞의 책, 500쪽.
6> 앞의 책, 512쪽.
7> 앞의 책, 512~513쪽.
8> 앞의 책, 50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함세웅 #함세웅신부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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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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